안단테 칸타빌레

 

완보(緩步)라기보다는 질족(疾足)이니

산책(散策)에는 어울리지 않고

아베크하기(요즘도 그런 말 쓰는지... rendezvous)에도 채택할 수 없지만

난 보통 빨리 걷는다.

따라오지 못하는 짝이 중간에 증발하고 그것으로 끝나버린 일도 있었다.


혼자 걸으니까

만보(漫步)라고 만보(慢步)이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게 내달으면 소요학파(逍遙學派, Peripathetics)에서 퇴출하겠소”라는 농담에

쓴웃음 짓기도 한다.

그래도 생각 없이 내닫기만 하는 건 아니라니까.


굳이 목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나

돌아갈 곳이 있으니 이리저리 다녀도 괜찮지

묵을 데 찾아 기웃거리거나

갈 바를 알지 못해

“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라는 형편이라면

걸음걸이가 무거울 것이다.


그게...

계속해서 알레그로 비바체로 나아갈 수는 없으니까

숨 고르자면 느리게 걸을 때도 있을 것이고

노래하듯 천천히 가면 좋겠지만

그러다가는 등속도 직선운동이 비실비실 멈추게 되니까

가끔 가속도 필요하게 된다.


밤길 나갔다가

앞서가는 여인을 추월하려는데

그녀의 워크맨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가 흘러나왔다.

엿들으려고 걸음을 늦추었는데

그녀가 홱 돌아본다.

놀라셨나봐 에고 죄쏘옹합니다~

아첼레란도/ 아 템포로 지나쳤음.


“원숭이 000은 빨개 빨가면 사과”로 이어지는

연상 작용에 따라

안단테 칸타빌레 듣던

톨스토이가 울었다더라

부활, 음 카추사, 유형, 눈이 안 오나

그러다가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부분은?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보내드린

    첫사랑 맺은 열매 익기 전에 떠났네

    내가 지은 죄이기에 끌려가고 끌려가도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보고파라 카츄샤

    찬바람은 내 가슴에 흰 눈은 쌓이는데

    이별의 슬픔 안고 카츄샤는 흘러간다

 

괜히 꿀꿀해졌다.

 

쫓기거나 좇는 게 없다면

걸음은 왜 빨라야 하는가.

마음 빼앗김(志)이 없는데도 

소요유(逍遙遊)는 즐기지 못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