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 되어 만나는 사람들

 

먹었다고 탈이 나지는 않겠지만 조금 쉰 것 같은 음식 있지!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만 신선한 기운을 내뿜지 않는 그저 그런 사람을 만나서

그의 호들갑스런 인사를 들을 때에

도리 없이 새어나오는 한숨.

호흡이 약간 가빠지다가 목구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

한심 반 기대 반의 비율이 “역시...”라는 판정과 함께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쯤

일 때문에 만난 거니까 이후로 계속해서 짊어질 관계는 아니라고 다짐하며

그저 손해 보는 쪽으로 흥정이 전개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근심과 우월감--그 왜 참여정부의 도덕성의 긍지 같은--을 눈치 채지 않도록

무의미한 너털웃음까지 곁들이며 표정 관리에 애쓴다.

그러다가

놀람으로 눈이 커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끄러움과 경탄을 담고 그를 바라보게 된다.

저렇게 괜찮은 분을 알아보지 못했구나.

그의 맑지 않은 눈빛과 좀 과장스런 몸짓까지 흉이 되지 않는다.

(그 나이 되면 그렇게 되는 거니까.)

아 저분에게는 그런 고민이 남아있네?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으로 더 잘 알려진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을

큰소리로 외치면 피곤해진다.

옳음을 선택하여 이로움이 따르면 무슨 고민이 있겠는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로 엮어진 책에서 정약용은 옳음이 이로움이라고 했거니와,

음(沈吟, 소리가 컸나...), 정말 그렇던가?

의를 지키다가 해를 입은 이들을 존경하고

불의를 따라 이를 챙긴 이들을 미워하며

불의를 택하고도 해를 입은 이들을 경멸하는,

“우리야 뭐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네.”


그렇지만,

“처자식 생각해서(?) 대의를 따르지 않은 신숙주를 두고 뭐라 할 게 아니던 데요.”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될 때쯤 되었으면

(출가한 자녀들 제 앞가림하겠다, 빚 없는 집 하나 챙겼겠다,

그러니까 손해 좀 봐도 크게 망할 것도 없는 나이쯤 되어서는),

“눈앞에 놓인 뻔한 이끗을 보고 먼저 의리를 생각해야지”라는 말

할 수 있겠지?

(단 저한테만 들리게 작은 소리로.)


내 앞에 앉은 이가 그저 고민하는 시늉만 하더라도

“혹 제가 손해 보는 것을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라는 말 참느라고

난 호강해보지 않은 식솔 얼굴들을 얼른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