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4
응 이게 웬일?
기록상으로 5월에 가장 추운 날로 인정, 화씨 35도-빙점이 32도이니까-까지 내려갔다.
그러면 꽃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
곧 기온이 올라가니 얼어 죽은 것들이 깔린 처참한 벌판 꼴이 되지는 않겠지만
마트 앞에 내놓았던 화분들에 심긴 꽃들은 상품가치를 잃었다.
땅뙈기 없어도 베란다에서 나물과 샐러드 용 푸성귀 기르는 사람들 간밤에 시껍했겠네.
나무상자에 돌나물, 취, 부추, 들깨, 쑥 심어두고 나물과 샐러드용으로 뜯어먹는다.
주운 도토리로 묵까지 만들어서...
그래서 겨울이 다시 돌아온 게 아니고
앞으로 몇 달 동안 머리가 띵하도록 뜨거운 햇볕 사정없이 내려쬐기 전에
떠나는 봄의 불회귀점을 극적으로 뚜렷하게 각인시킨 셈.
몇 시간 지나고 나니 평균기온으로 회복, 따뜻함은 넘어선 듯.
봄이 왔는데 꽃이 없다? 봄 같지 않겠네.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어...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아 뭐 한국처럼 아기자기하지는 않지만 여기서도 꽃 많이 봤네.
꽃놀이 그만큼 했으니 ‘봄날은 간다’의 정서가 가슴 저미는 아픔은 아닐 텐데
그래도 그게 아닌?
천년도 전에 산 사람들, 글 좀 쓴다고 해서 요즘도 우러르는 이들은 꽃철 한 때
꽃가지를 꺾어 술잔 수를 헤아리며 취하였고(“花時同醉罷春愁 醉折花枝當酒籌”, 白居易)
여인도 아닌데 꽃을 머리에 꽂고는(If you go to San Francisco?)
“사람이야 늙어 꽃 꽂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꽃은 늙은이 머리에 오르는 게 창피하겠지”
(人老簪花不自羞 花應羞上老人頭) 했다대.
{蘇軾이 ‘吉祥寺賞牡丹’을 주절거릴 때 나이가 37세였다는데, 거기다 서른을 보탠 사람은 그럼 뭐야?}
다시 올 봄 한 번 더 맞이하지 못할지도 모르면서 봄날은 간다 그러는데
그리 말할 게 아니구먼, 가는 건 인생이 가는 거네.
다들 가는 건데
마주보며 달려왔다가 지나치는 열차들처럼
스침의 순간이 石火-부싯돌 찰칵, 불꽃 반짝-처럼 짧게 느껴지는 것들이 따로 있는지?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슬픔도 그러네. {“영원히 남았네” 그럴 것 없네.}
아주 잠깐 곁에 있다가 떠나는 걸 헤어짐? 무슨 결합이 있었다고...
그 머묾, 더불어 있음이 좋은 추억.
정말 아름다우려면 끝이 좋아야.
꽃은 예쁘지만 끝이 좀 그래.
이울기 전에야 좋지만
지는 모습이 그래서야...
{하긴 그 덧없음을 달래려 너 참 곱다 하는 거겠지?}
지속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긴 것들 쪽으로 눈을 돌리면?
나무가 있겠구나.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아니라도
한백년이면 되지 않는가
가을 되어 잎들 다 털더라도
그렇게 비워 겨울 나며
거기 오래 그대로 있으면 됐지.
나무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게 없고
이성선 시인의 노래 두 편 싣는다.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인가?-
바라보면 지상에는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늘 하늘빛에 젖어서 허공에 팔을 들고
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준다
땅속 깊이 발을 묻고 하늘 구석을 쓸고 있다
머리엔 바람을 이고
별을 이고 악기가 되어 온다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듯
나무도 나를 바라보고 아름다워할까
나이 먹을수록 가슴에
깊은 영혼의 강물이 빛나
머리 숙여질까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혼자 있어도 놀이 찾아와 빛내주고
새들이 품속을 드나들며 집을 짓고
영원의 길을 놓는다
바람이 와서 별이 와서
함께 밤을 지샌다
-소식-
나무는 맑고 깨끗이 살아갑니다
그의 귀에 새벽 네 시의
달이 내려가 조용히
기댑니다
아무 다른 소식이 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Isidore Lucien Ducasse, 저는 Comte de Lautréamont이라고 한다던가, 그랬다네.
“나무는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