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저녁 단지 내 공원에 서서
1
지하층 식품 코너
밥 먹고 나선 길인데도
다 먹고 싶은 것들이다.
그때 그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다고 그랬지.
뭘 사려고 온 건 아니지만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 들어있는 줄 안다.
왕년에 무전 여행할 때도 땡전 한 푼 없이 떠난 건 아니니까.
강도 만났을 때 줄 돈 없어서 목숨 바치지 않도록
비상금은 챙겨 다녔으니까.
막장 털이 팔천 원짜리 오천 원에 가져가세요.
생굴 한 봉지 들까말까 하는 동안
침을 두 번 삼켰다.
미국 건 늙은 백인 같았거든.
발걸음 돌리고.
책방.
시집 한 권 들고 만지작거린다.
표지 이면에서 푼수처럼 웃는 얼굴
입 맞추고 싶다.
오천 원.
그런데 내가 왜 시집을 사야 돼?
입상진의(立象盡意)라면 나도...
임마, 꽃이라 치고
다른 꽃들 보며 예쁘다 하는 거지
제가 절 어떻게 보냐?
이미 아는 시 두어 편 읽고는
다시 안 열어볼 게 뻔하니까
그리고 초판 나온 햇수로 치면
난 시인보다 두 배를 더 살았거든.
그만 두기로.
비상금은 비상시에만 쓰기로.
2
아 눈이 내리네.
(“아” 할 건 없지, 예보가 있었고 기대하며 나왔으니까.)
이십 년 북국에 사는 동안
눈 치느라고
얼음비 내린 길에 운전하느라고
고생 많이 했더랬지.
그 후 십 수 년 남도에 사니까
눈이 그립더라.
고향에 돌아와
다시 만난다.
이런 밤 사랑하고픈
흩어진 연분 어찌어찌 다시 모으고 싶은 마음
흉이 아니겠지?
약발이 다한 거지만
“내게 당신은 첫눈 같은 이”(김용택)이라고 외쳐볼까.
당신 하나로 밤이 깊어지고 해가 떴습니다.
피로와 일 속에서도 당신은 나를 놓아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기도, 명상까지도 당신은 점령군이 되어버리셨습니다.
내게,
아, 내게
첫눈 같은 당신.
이런 때는
산사(山寺) 마당에 일만 등(一萬燈)을 거는 거야.
만 번 점등(點燈)하면서
만 번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그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건 아무래도 좋다고
일단은.
어제 동창회의 송년 모임이 있었는데
40년 만에 만날 얼굴들 기대가 되면서도
가지 못했다.
대신 덕담이라도 남긴다.
근하신년(謹賀新年)이라는 상투어가
님이 사용하시니
그지없이 고담(枯淡)하네요.
서설(瑞雪)로 축복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구나.
숨겨도 이내 들통날 것이니
눈 덮였다고 좋아할 것도 아니지만,
잠시라도 시름 가리도록
펑펑 쏟아져서 소록소록 쌓이거라.
펄펄 날리는 눈꽃송이 제 각각이나
흰 홑청 한 장으로 펼쳐지듯이,
화동 일 번지 나온 이래
걸어온 길 다르더라도
한 마당에 모이자고.
만변귀일(萬變歸一)이라나.
그렇게 가슴 떨리는 처음을 확인하자고.
새해에는
사랑하지 못할 사람들이 줄어들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고,
마음결에 찍힌 흉터들이 흐릿해지고,
가난이 부끄러울 건 없지만
쪼들리지는 말고,
망가진 건강 때문에 한숨짓지 말고,
약한 이들 도울 수 있는 힘은
좀 남겨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납전삼백(臘前三白)이면 풍년이라던데,
허허허허
저렇게 뿌려주시니,
만사형통(萬事亨通)은 불문가지(不問可知)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