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벤 날
마침 비가 내린다
빗물이겠지
땀방울인가
큰비 오고 나면 물빛이 이렇지만 보통 때는 맑다고
드디어 쓰러졌다
(쓰러트린 거야)
생각보단 큰소리 안 나네
전에도 몇 차례 베고자 했어
도끼 찍는 소리 한번 울릴 때마다
머리 속이 하얘지다가 까무러치곤 했지
나중에 가슴에 난 도끼 자국 쓸어 만지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단칼에 베어야 하는데
무공도 형편없는 데다 어디 그런 보검이 있겠어
어찌하여 없던 내공이 갑자기 생겼는지
무슨 깨달음으로 심검일체(心劍一體)가 되었는지 설명할 길 없지만
아무튼 마음을 모아 날을 세우고 정심한 기운을 실어 휘두른 모양인데
넘어갔네
전에도 더러 가지도 치고 베기도 하고 그랬어
길 내고 땔감 장만하고 어린 나무 자랄 자리 터 주자면
나무 자르는 건 노상 일과였다고
그런데 왜 그랬을까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는 나무 하나 자르지를 못했어
오늘 베기는 했는데 아직 치우지는 않았어
그저 고만고만한 크기의 이런저런 것들이 비비적거리는 숲에
언제 들어섰는지도 모를 나무가 자라게 되었어
대나무는 하루에 한 마디씩 자라 한 달이면 다 큰다고 그러는데
그건 그런 정도가 아냐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기가 차더군
옆에 있는 것들이 견디지 못하게 되었어
그것들은 많이 요구하지도 않아
한 뼘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한줌 햇볕씩 나누어 가지면서
불평하지 않아
그런 것들이 비명도 지르지 않고 죽어가더군
내 숲에도 별나게 큰놈 하나 자라도록 내버려두었어
은근히 자랑하고 싶더라
그게 하늘을 가렸던 거야
지력을 독식한 거야
그러면서 죽였던 거야
모래알 같은 다이아 천 개 만 개보다는
다섯 캐럿 정도 되는 거 하나를 얻는 게 낫지 않냐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값진 진주를 산 사람 얘기까지 들먹이며
지키고 싶었어
다른 것들은 보석이 아니고 생명이거든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라고
다들 가지고 싶어하는 보석을
내가 지켜야 할 이유는 없거든
보고 싶을 때 박물관에 가면 되거든
그랬던 거야
이유가 있었다고 쉬운 결정이었겠니
그루터기에 뭔가 돋아날 거야
지나간 영광을 회복하고 싶은 잔가지들도 일어나겠고
무슨 버섯인지 펑거스인지 혹은 잡풀도 기생할 거야
무심한 새가 쉬어 가는가 하면
진액이 마르지 않았는지 나비들이 정신 놓고 빨기도 할 게고
거기에 그리 큰 나무가 있었다고 기념비 세우지 않아도 돼
공룡의 발자국 보고 우와 무지 컸겠네 하듯이
잠깐 탄식하거나 마음을 가다듬어 묵념하는 이들이 있을 테니까
참 그래
그렇다니까
그래
나 지금 그래
일어나자 이제
찬사에 익숙한 장미에게
튀는 가사 새 노래를 지어 아첨할 것 없고
눈이 천 개 손이 천 개 아니라서
내 돌봄의 범위가 넓은 건 아니지만
그간 몰라봤던 꽃들 언제 그만큼 자랐는지 모를 나무들
다 이름지어주고
(제 이름이 없겠냐만 내가 다시 지어줄게)
가꿔줄게
나 조금만 쉬고 나서
볕 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