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Sunday (16)
이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고
아름다운 날이다.
어쩜 이리 예쁜 것들뿐일까? 보이는 건 다 귀엽구나. So adorable.
내가 지금 연애하는가봐, 그렇지 않고서야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냐고.
(아직 경로우대권 발급 받진 못했지만 중늙은이임엔 틀림없거늘, 그래도 꿈은 야무져서?)
하, 옴두꺼비 화상(畵像)마저 귀여워 입맞추고 싶네.
날씨가 좋으냐고? 아니.
뭐 특별히 좋은 일이라도? 아니, 그냥...
그 왜, 'Black & Black' 라고 했던가, 그거 아주 깔끔한 아름다움이더라.
그렇게 말이지, 어둠 위에 어둠을 개칠한 것 같은 암흑의 심연에서도
아름다움은 드러나더라고.
강림절(降臨節, Advent)
칼바람이라는데 시원하기만 하네.
남풍은 아닌 듯 한데 어디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인가?
흠, 오지 않은 것(未來)이 이미 있는 것(旣存)을 밀어내는 기세이구나.
(이건 Futur가 아니고 Zukunft이라고.)
올 날이 오늘에 겹쳐서 그렇구나.
올 것이면 어서 오지 않고.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생활 고달파
메시야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라 임마누엘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아직 오지 않았으나 이미 온 것 때문이었구나.
마리아의 찬가(The Magnificat)
누가복음 1장 46-55절 말씀은 성경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가장 강력한 메시지이다.
그것은 '마리아의 찬가'로 알려졌고,
'찬양합니다(magnify, glorify, praise)'라는 뜻의 라틴어를 따라 '마그니피캇'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리아.
개혁신학의 과도한 '개혁' 탓에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마리아'가 참으로 거북한 존재가 되고 말았는데,
정서를 고려하여 'Blessed Virgin'이나 'The Mother of God'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겠지만...
앞에 '성모'를 붙여 읽으실 분은 그리 하시기를 환영합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있는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녀의 잉태를 알린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마리아에 대하여
천사가 엘리사벳의 경우를 들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하자,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후에 엘리사벳을 찾아가 그녀의 축복과 흠숭을 받은 후에 마리아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전문은 옮기지 않지만...)
'마그니피캇'은 환희의 송가이며 희망의 선언서이다.
('잔은 채워야 맛'이라고 그랬던가?)
그것은 감사와 나눔(sharing)의 정서로 찰랑찰랑 넘칠 만큼 채워진 잔이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이며 가장 강력한 공포(公布)이다.
('공산당 선언문' 같은 건 "저리 가라"인데, 왜 교회가 그 힘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마리아가 모르는 사이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고 하여,
마리아는 그저 빈 그릇처럼 받아들이기만 한 수동적 존재(receptacle)가 아니다.
그녀는 이루어진 모든 일들의 전적으로 능동적인 참여자이다.
하나님은 부르셨고 마리아는 동의하였다.
그것은 두 자유의 만남이다.
무엇이라도 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유와
신적 초청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라는 마리아의 자유가 얽혀 이룬 역사이다.
존재의 심층에서 그녀는 자유롭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었고(은총을 가득히 입은 자),
그런 의존 속에서 근본적인(radical) 자유를 발견하였다.
마리아는 잊혀진 땅 작은 마을에 살던 한 처녀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세상은 관심이 없다.
그녀에게 일어난--처녀가...-- 일이 알려지면
비정한 사람들은 정의를 집행하기 위하여 돌을 들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순종과 '감행(敢行)'에 의하여 '일'은 터졌다.
당신은 순종하고, 참여하고, 저지를 수 있는가?
Kyrie Eleison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을 아십니다.
그 고통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다 치워지기 전이라도,
그 흉하고 의미 없고 피하고 싶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시고
거쳐가야 할 것으로, 어떤 형태의 의로운 것으로 전환시키십니다."라는 말씀 후에
'나의 아픔'을 알릴 사람들은 일어나 말하라고 초청하였다.
1 할머니: "나는 암으로 4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습니다.
의사가 성탄절을 지날 수 있을까 그랬는데, 이제 한 주일 남았습니다."
(아니, 아직도 쌩쌩한데, 더 오래 사실 것 같은데...)
2 아줌마: "나는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사람입니다.
전남편의 새 여자와 좋은 낯으로 인사하며 지나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3 아저씨: "제 딸은 22살입니다.
걔는 몇 년 동안 일곱 번 병원에 입원했고, 두 번 감옥에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콘도를 얻어 들어와 삽니다."
어느 교회는 교인들 중에 이혼한 사람이 없다고 자랑하더라마는...
추문이 없다고 자랑하는 목사, 아픔이 없다고 감사하는 교인.
에구, 우리 동네 사람들은 왜...
같이 기도했다.
"가장 깊은 감사는 아픔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너무 지쳐 사랑이 솟아오르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증오의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폭풍우에 대한 대비가 없습니다.
어떻게 좀 도와주십시오."
"'여럿 중의 그저 그런 하나'는 싫다고 그랬더니,
그녀는 '딱 하나'로 택하기에는 부족하다며 미적거리기에
그만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고 그런 친구로 남아 있을 때보다 더 괴롭습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쪽박 차게 되었는데도 남편이 무슨 궁리를 하지 않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찢어진 마음을 꼬매주십시오.
반짓고리는 보관했는데, 저 바느질할 줄 모르거든요."
"당신의 손바닥에 난 못 자국이 하늘로 날아가 바라볼 별이 되게 하셨습니다."
"믿음을 잃었던 우리들의 삶에서 다시 왕으로 즉위하십시오.
대관식을 치러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섬길는지 알려주십시오."
짝이 있으니까 결국 제 집으로 가겠지만
예배는 끝났지만 헤어지기가 그래서 같이 쏘다녔다.
감자탕, 청국장, 손두부, 호박찜 나눠먹고,
병원에 들렸다.
돌아가실 준비 완료했는데, 일어나 앉으셨네. 농담까지 하고.
하나님 하시는 일이니까...
근사한 커피 집 들렸다가
또 하는 얘기, "아, 집에 가기 싫다."
솜씨 좋은 자매가 떠서 나눠준 목도리를 두르고 인공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식당 개 삼 년이면 라면 정도는 끓인다는데, 누가 그런다.
"낙천주의자는 이미 상처가 아문 흉터를 보고 있지만
비관주의자는 아직도 딱지 아래 있는 상처를 보고 있습니다."
이제 고만들 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