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노래
같이 산다면 무슨 적바림이 필요하겠는가마는
다따가 헤어지게 되면
그립지만 선명한 그림으로 떠오르지 않는 것들이
그렇게 아쉽더라는 거야.
비행기에 수첩을 두고 내렸다.
신분상의 비밀 정보 누출이 염려되기보다는
그건 보내지 않은 편지묶음 같은 거였어.
너무 아까워 쩝쩝...하다가
에이 잘됐다, 청혼에 실패한 반지 내던지듯
버린 것으로 치고, 뚝!
나이 들면 보통 그렇긴 하지만
요즘 되어진 일은 통 기억이 안 나고
(그러니까 비망록이 필요한 거지)
옛날 노래는 새록새록 봄 풀 돋듯 기어 나오네.
그때는 유성기 바늘을 수채 구멍 옆 시멘트 바닥에 대고 갈아 썼거든.
태엽 감고 자세를 잡고 나면 흘러나오던 것들.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여러 버전이 있겠으나, 이 절은 이렇게 끝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운 새들은 집을 짓고
기쁜 노래 지저귀며 부른다
우리도 노래를 부르자
매기 내 사랑하는 매기야
우남 할아버지 경무대 계실 적 얘기.
(혼자 다방 출입할 나이는 아니었지, 험.)
시장통 목조 이층에 있는 다방
구공탄 간지 얼마 안 되어 일산화탄소를 염려할 즈음 출근하듯 나타나는 아저씨.
"내일이라도 마카오에서 배가 들어오면..."이라는 그 지겨운 사기극으로 날마다 고문당하면서도
그까짓 쌍화차 한 잔 팔아주는 단골이라고 싫은 표정 지을 수 없었던 마담.
아 그 아줌마가 부르던 노래도 기억난다.
저녁노을도 사라지고 어둠의 장막 짓쳐든다
모진 바람이 불기 전에 어서 집으로 돌아오라
옛날을 '노래'로 다 살필 수는 없고...
허드레 광에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던 것들이
절 먼저 안아달라고 달려든다.
(이하 무순, 뒤에 나온다고 화내지 마.)
싸리비 함지박 빨래방망이 다듬이돌 소쿠리 키 멍석 토담 장독대 놋주발 보시기 살강 창호지
미농지 빤딱종이 은박지 빠닥시돈 사진틀 지우산 솜틀집 뻥튀기 번데기 양은벤또 떡메 절구공이
부채 참빗 지우산 모래무지 쏘가리 때까치 노고지리 능구렁이 타래엿 씨암탉 DDT...
거기다가 사람 이름 몇을...
윤동주는 너무 많이 갖다 붙이더라.
소학교(小學校)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별 헤는 밤')
(시간부자라 할 짓 없어서 이러고 있는가, 뭐 나도 좀 있으면 바빠질 것이다.)
널 안으면
처네 하나 안 덮어도
다스웠지.
널 생각함으로 날밤 새우고
때꾼한 채로 진종일 널 기다렸다.
그랬는데
아쉬움 감춘 것 같지 않은
그저 빙그레웃음으로
헤어질 줄이야.
언제 적 얘기라고...
옛날 노래 괜찮은 건 정말 괜찮았어.
좋으니까 좋아한 거지.
예나 지금이나 사람 맘이라는 게 그렇지 뭐.
해서...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
옛날 노래는 아니지만
가슴에만 품고 있다가 늦게나마 토하기로 작정하고
늦깎이로 시집 하나 들고 나온 이가 있어서...
바람 자고 간 곳에 하늘 이불 깔려 있다
풀들 늦잠을 자고
귀먹은 문고리 구부린 채 묵상에 들고
쇠스랑은 옛 주인 손길 잊지 못하고
호미, 삽, 괭이 한 촉의 꿈 버리지 못하고 있다
여기 건네기 어려운 말이 있고
건너기 어려운 강이 흐르고 있다 심심찮게
뒷마당 장독대에 옛 주인 체온 스며들고
툇마루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썰린다
담배 부스러기처럼 옛이야기가 날리고
제 그림자에 놀라 달을 보고 짖어대던
개의 밥그릇에는 얼지 않은 눈물 고여 있다
눈부신 것들은 잠들고
빛을 잃은 것들만 남아 빈집을 지킨다
새들 그리움의 날개 짓하며 울다 떠나고
풀벌레 빈 집 막장 그늘에 남아
서러움을 뜸질하면
내 마음 밑뿌리부터 아파 온다
(설동원, '빈집')
눈부신 것들은 잠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