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일부러 마르그리트(Marguerite Gautier)를 찾아 나선 길이었으나
지난 봄 남도 여행에서 보지 못했다.
늦추위로 꽃소식이 연착하는 바람에.
오늘 '춘희(椿姬)'를 보았다.
꽃집에서.
철이 아니니 그렇지 뭐.
좀 지나 LaCanada에 가면 병풍인 듯 꽃자리인 듯 지천으로 널렸겠으나
이젠 한국에 가서 보련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동백은 신라에서 왔다(海紅花出新羅國)"고 그랬지만,
이제 와서 "고구려는 우리 땅!"이라고 하는 얘기나 다를 바 없지,
서양인들은 Camellia Japonica로 알고 있다.
(젊었을 때라면 다퉜을 것이다, "그건 한국이 원산지야" 라고.)
그거 좀 끔찍하고 섬쩍지근해.
톡톡 부러지는 소리, 툭툭 땅에 닿는 소리.
그리고 피 흐르잖아.
붙어있는 꽃보다 떨어져 구르는 게 더 많은 것 같아.
(그래도 다음날 보면 아직 달려있는 게 많지만.)
흩어지지도 않고 시들지도 않은 멀쩡한 꽃들을 밟기가 죄송해서
어디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던 걸.
(얼마 전에 "사뿐히 즈려밟고 돌아오세요"로 깔아놓은 건, 아휴 그건 좀 심했지?)
(사진: 이형철, namdophoto.com)
그 아저씨는 뭐가 그리 그립고 또 원통하기에
진저리나도록 진한, 훔치지 않아 뚝뚝 떨어지는 글을 쓰실까?
원통함이 설령 하늘만 하기로
그대 위하여선
다시도 다시도 아까울리 없는
아 아 나의 청춘의 이 피꽃!
(유치환, '동백꽃' 중에서)
뭐 나는 "젊음으로 말미암은/ 마땅히 받을 벌이었기에" 대목에서 걸릴 게 없지만
(내 청춘 정말 바보처럼 깨끗했어.)
그게 (에구 아까워라, 그렇지만 그대 위하여선) 아까울 것도 없는 피꽃 임은 인정해야겠다.
마음은 그렇더라도
좀 순하게 말할 수 없을까?
백설(白雪)이 눈부신
하늘 한 모서리
다홍으로
불이 붙는다.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그 뉘를 사모하기에
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 피는가.
(정훈, '동백')
그리움이란 게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니고
오히려 저승 가다가 불지피듯 하는 것이라서...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사람들은 누구나
해질녘이면 노을 한 폭씩
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서성거린다.
(조태일, '노을' 중에서)
시퍼렇게 얼어붙은 하늘에다 대고
그리운 이름 불러보는데
흐릿해지기 전에 부르르 떨며 붉음을 토해내듯이
오늘은 부르는 소리가 더 커진 듯 하다.
터놓고 얘기하자고.
누구에게라도 어두워질수록 더 잘 보이는 얼굴이 있거든.
아주 캄캄하면 막상 다가와도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등잔 하나는 켜두지만.
殘燈明滅影搖紅(잔등명멸영요홍).
(부끄러워라, 안정복은 '대학'을 읽고 나니 밤이 깊었다고 그랬는데.)
수도자라면
족제비가 닭X구멍 갉아먹는 듯이 천천히 순하게
은쟁반에 찬 옥 구르는 소리로 보고 싶다고 그럴 것이다.
생전 처음 듣는 말처럼
오늘은 이 말이 새롭다
보고 싶은데...
(... ...)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감칠맛 나는
네 말 속에 들어 있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그리움의 바다
보고 싶은데...
(이해인, '보고 싶다는 말' 중에서)
아주 막 가기로 작정한 게 아니고
확 부는 성질이라 그런데...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