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용기 (Beautiful Sunday 17)
강림절(Advent, 대림절) 촛불이 다 켜졌지만
다섯째 촛불, 아니지 바로 그 촛불이 켜지지 않는다면
앞선 일들은 쓸데없는 소동일 뿐.
드디어 그리스도의 촛불이 켜졌다.
그것은 완성이고, 약속의 성취이니까.
기쁘다 구주 오셨네(Joy to the world, the Lor is come).
간만에 '구주 탄강(救主 誕降)'이라는 말을 되뇌어본다.
크리스마스.
그리고 가는 해의 마지막 주일이다.
한 여인이 모노드라마로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열연했다.
(얼마나 깨끗한 발음이었던지.)
마리아의 용기.
그리고 우리의 용기.
그것은 이판사판 검투사의 용기와는 다른 것이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가 아니고, 개들이 훈련되었기에.)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반납하고 복종할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하는 용기.
순명(順命)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할만한 일인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내는 비관론자이다.
먼저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최악의 일이다.
좋게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이 나의 왕짜증을 점화시키곤 했다.
비관론자(pessimist)이면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낙관론자이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현실을 수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비겁한 사람이다.
'희망의 정치학(The Politics of Hope)'의 저자인 랍비 Jonathan Sacks는
낙관(樂觀)과 희망의 차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낙관은 수동적 상태이고 희망은 활동적인 것이다.
낙관은 일들이 저절로 잘 되어나가리라는 신념이다..
희망은 우리가 함께 일들(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희망은 행동을 촉구함이다.
희망은 용기를 불러온다.
'피파는 지나간다(Pippa passes'라는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시,
"계절은 봄/ 날로 치면 아침..."으로 시작해서
"하나님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태평합니다"로 이어지는 구절이 있다.
(그런가, 하나님 계셔서 모든 게 잘 되어간다고?
"죄송합니다, 아닌 것 같은 데요.")
그래, 그건 낙관론.
그런데, 저절로 잘 되어간다(Things of their own accord are going to get better)?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Never happen.
힘을 가하여 상태가 바뀌지 않는 한 움직임의 방향도 바뀌지 않고 가속도도 생기지 않는다.
(뉴턴의 제일 운동법칙, 에헴.)
열역학 제이 법칙,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내버려두면 다 쇠락(衰落)과 파멸로 나아가지 않는가?
그게 '저절로'라고.
그러니, "내삐도~" 하지 말자고.
막내가 미국으로 온지 몇 달만에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Together we can make difference."라는 캠페인 구호로
(누가 만들어줬는지 열 살 짜리 후보가 부르짖기엔 좀...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들은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랬기에 그 학교에서 뭐가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노력한다고 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기도('Serenity prayer' by Reinhold Niebuhr)가 있다.
하나님 이런 것들을 제게 허락하소서
제가 바꿀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평정을
제가 그럴 수 있는 일이라면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저물 녘.
어찌하랴 지나간 것들을.
봄에 심지 않은 것을 가을에 거둘 수 없고
잘 가꾸지 않고서 좋은 열매를 얻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얻은 게 없지는 않으니까
그걸 가지고 뭘 만들어 먹을까는 내 맘대로 아닌가.
후회할 것 없고
우선 밥 해먹고 보자.
먹고 힘 얻어
기도하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자고 나서) 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