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영화

 

마지막이라며 다시 보는 활동사진


가만히
아주 가만히
쉬이~ 할 건 없지만
여기 있음을 일부러 알리지 않을 만큼 가만히
절절한 해넘이는 어느새 지났는데도
그렇게 한참 머물면서
어둑해진 하늘에 펼쳐지는 장면들을 본다
나는 뭐 여러 번 본 영화지만
딴 짓 하던 애가 혹 고개 쳐들면 보게 될까 해서
영사기 돌린다
밤 지나 날 새면 못 볼 거니까
나도 마지막으로 보는 셈치고

 

 


 

필름이 오래 된 것도 아닌데
비가 많이 오네
저러다 끊어지겠구나

 

 

 

 

 

Ubi Sunt


그 시절 동무가 세모에 보낸 편지에 그랬다.


    그 아름답던 날들은 어디로 갔는지
    ubi sunt motif에 눈시울을 적시게 되는 무렵


(가만.  아름다웠던가?
그거 '뽀샤시 처리'해서 그런 거야.
아냐, 일부러 손댄 게 아니라니까,
파리똥 앉은 누런 사진들은 다 그립던 걸.)


걔들은 아직 거기 있을까?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예쁜 것들은 그렇게 빨리 가버리는가?

 

 

 


그야... 아무리 오래 네 곁에 머무르더라도
더 붙잡고 싶은 거야 금방 사라진 것 같겠지.
독립군 서방님과 하룻밤 지내기.


갔다고 아주 간 것일까?
간 거야 간 거지만
온것은 아니라도
남겨둔 것도 있을 게고
흔적은 남는 거니까.


    이 지상에 떨어진 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더러는 불 타 허공에 사라지고
    더러는 죽어 운석으로 묻히지만
    나는 안다.
    어디엔가 살아 있는 별들도 있다는 것을.
    깊은 산 속
    구름이 호젓하게 머물다 간 그 자리에
    아아, 날개만 상한 채 떨어진 별들이
    도라지꽃으로 피어 있다
    그 눈썹에
    아슴히 맺히는 이슬은
    다시는 하늘로 돌아갈 수 없는 그
    슬픔 때문.


        (오세영, '도라지꽃')


 

 

 

하늘로 돌아갈 것 없다.
너 때문에 울 사람 뒤에 남기지 말게.

 

 

 

돌아가지 못하고


이젠 거기 다듬이질 소리는 아주 사라졌는가?
아랫목 이불 밑에서 맘놓고 얽혔던 다리들은 잘들 있을까?


    故林歸末得 排悶强裁詩 고림귀말득 배민강재시 (두보의 '江亭' 중)


"가야지 하면서도 고향엔 못 가고 시름 밀어내고자 억지 노래 짜낸다"고 그랬지만,
요즘에야 못 갈 것도 없는데 안 가게 되는, 결국 '안'이 아니라 '못'이 되어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가 되었다는 얘기.

 

 

                                                                                                 (이형철, '낙안')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놓고서


        (시 137:1~2)

 

노래는 무슨 노래
그냥 얼어붙은 하늘에다 대고
이름 몇 개 불러보지?
(눈이 올라나 젖어선가 퍼지질 않네.)

 

 

 

이 마음 어이 해


호롱불 불꽃이 많이 흔들린다.
장짓문이 윗바람을 막지 못하는 걸 어쩌겠는가.


    此時此夜難爲情 차시차야난위정  (이백, '三五七言' 중)


흔들리는 건 창피한 일인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그래서 잘났다는 게 아니고
흔들릴 때도 있다는 것.
좀 봐달라는 것.
뿌리깊은 나무도 좀 흔들기도 하더라는.

 

 

 

기쁨은 빠르고 설움은 끝없어


그런 거다.
기쁨은 밀물처럼 왔다가 다 빠져나가고
슬픔은 딱 한 방울뿐인데 결정체로 남더라. 

 

 


 

사랑은 늘 그런 것
채워지지 않고
다 이룰 수 없는 거니까
그렇게 지나치긴 했지만
"그만 해도 어디야!"로 감사하고
흐름을 잡을 수 없는 거니까
보내고도 "좋았노라!" 하는 것.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세상에 사랑해선 안될 사람이 어디 있겠니?
그렇지만 후회는 있으니까


    하늘이 못 주신
    사람 하나를
    하늘 눈감기고 탐낸 죄
    사랑은
    이 천벌


        (김남조, '사랑 초서 44')


후회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

 

 

 

 

 

눈물만큼 좋은 사람


누가 그러더라.


    No man or woman is worth your tears,
    And the one who is, won't make you cry.


    네 눈물만큼 값나가는 사람은 없어
    그런 사람이라면 널 울리지 않을 게고


내가 그랬다.


    눈물만큼 좋은 사람
    아니면 사랑하지 않았겠지


울리고 울다가
분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해서
"Non t'amo piu" 했겠지.


"홧김에 무슨 말은 못해?" 하고서
하하 웃을 수 없을까?

 

 

 

 

 

이쯤에서 그만


꼭 같이 있어야 되는 건 아냐.
좀 떨어져 있기도 하고.


    여유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 ...)

    그리고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박목월, '난')

 

 


 

기다림을 그친 사람을 놀릴 것도 아니고
힘들면 쉬기도 하는 거지.


아궁이에 가시나무 밀어 넣고
탁탁 소리내며 괄게 타오르는 불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복잡한 심사 정리되고 몸 데워지거든
아직 따뜻하지 않은 방에 들앉은 이를 안아주지.


 

                 

                                                                                          (사진은 목련 봉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