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올라
보름이구나.
겨울답게 한월(寒月)이면 좋겠고
선명한 선으로 정원(正圓)을 그리는 게 날 텐데... 하다가
무숙자, 노점상에 생각이 미치자 푸근한 날씨가 고맙게 여겨진다.
그리고 저렇게 달무리 져서
단단한 덩어리로 남아있는 게 아니고
경계가 흐려지고 모서리가 푸슬푸슬 헤쳐지면서
빛이 흩어지는 것이 참 좋다.
번지듯이 스며들고
퍼지듯이 흐른다.
어, 달이 어디로 갔네.
저러다 비가 올까?
가무니까 겨울비라도 오는 게 좋고
또 꽃필 때도 아니니까.
그렇긴 한데...
찬비 내리고
-편지 1
- 나희덕 -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그렇구나.
그랬구나.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