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에서 1 작은 산 오르기
시애틀-꼭 ‘씨아루’라고 발음하는 사람도 있지만-이라서 잠 못 이루는 게 아니고
알랑가 몰라 아직도 그대를 점, 점, 점
것도 아니고
두 시간 시차도 그렇거니와 좀 더 북쪽이다 보니 밤이 짧은 것 있지
빨리 밝아지기 때문에 잠도 짧아질 수밖에 없지만
나무 많고 차와 사람 적은 곳이니 공기 맑아 피곤함이 덜 하다.
미국에 이민 올 때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정착 과정이 결정되기가 쉬운데
그러니까 도넛 가게 하는 사람이 나오면 “뭐니 뭐니 해도 이만한 장사가 없어”에 따라가게 되고
그가 세탁소 하는 사람이라면 “말 못 하는 내가 이만큼 사는 게 다 빨래 하나 잘 해서인데”에 넘어가더라고.
어딜 갈 때에 포털 정보나 책 등으로 아무리 예습 많이 하고 가도 현지인보다 잘 알겠어?
그런데 그 현지인라는 게 “나는 직장과 집과 교회밖에 몰라” 하는 경우라면?
쩝, 부탁을 말지~ 뭘 모르는 지인 따라다니다가 아까운 시간 허비하고 말거든.
올림픽 반도에서 사흘을 자고 시애틀에 갔을 때 침식 제공과 더불어 나흘을 안내해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시애틀 처음 간 건 아닌데... 아 속살 쓰다듬듯, 침투공작조 임무 완수하듯 알짜배기 볼거리 놓치지 않았다.
“그건 꼭 보고 가야지”할 landmark, “여기가 시애틀이야” 그럴 만한 게 뭘까?
갠 날이면 워싱턴 주 어디서라도 볼 수 있는, 우뚝 솟아 하늘 아래 있는 것들을 압도하는 Mt. Rainier?
그건 볼 수만 있지 올라가기는 어렵다.
종아리는 좀 만질 수 있을까 싶었으나 이번에도 Paradise Rd와 Sunrise Rd를 닫아두는 바람에...
분루{憤淚, 이상하다 왜 국어사전에 실리지 않았을까?} 뚝뚝.
Space Needle? Boeing? Microsoft? Starbucks 1호점? Pike Place Market?
산 이름이 먼저 나와서 얘긴데, 워싱턴 주에만 백두산보다 높은 봉우리가 열 개가 넘잖니?
보기만 하는 산, 아무나 속살 건드리기를 허락지 않고
이름 있는 산악인들이 등반대를 조직하여 허락을 맡고나 들어갈 만한 산들 말고
북한산, 수락산처럼 도시 근처에 있으면서 아무나 받아들이는 산
그런 게 좋더라고. {그래야 나도...}
시애틀 인근 주민들이 올라갈 만한 산으로는 Tiger Mt (3004ft/ 916m), Cougar Mt (1598f/ 487m),
Mt Si (4167ft/ 1270m)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시시한 말,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Tiger Mt에는 tiger가 없다, Cougar Mt에는 cougar가? 아직 있다.
{그래서 이름이? 그건 모르겠네.}
서울 근처 산들이 대개 암산(巖山)이라면, 시애틀 근방의 올라갈 만한 산들은 흙산(陸山?)인 셈.
나무가 많아 응달로만 난 길에 서늘해서 땀 흘리지 않고도 올라갈 수 있는 건 좋고
워낙 빽빽한 숲이고 보니 정상에 오르기 전에는 조망(眺望)이 없다.
그래도 Mt Si에 오르면 Mt Baker의 위용(偉容)을 볼 수 있고
Tiger Mt 꼭대기에서는 Cougar Mt과 행글라이더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숲에는 고사리가 지천이고, 그 뭐랄까 페르몬 향이랄까 축축하면서도 상쾌한 기운이 코로 스며든다.
시애틀까지 와서 큰 산 한번 올라가보지 못하고?
산도 그렇고 다른 것도 그렇고, 큰 것보다는 작고 작은 것보다는 큰 상대적인 것인데
좋으면 됐지 크고 작음을 가릴 것 있는가?
태백, 함백산 같은 건 이름 깨나 알아주는 산이지만 들머리가 워낙 높은 데 있으니 얼마 안 가서 정상이지,
성삼재에 파킹하고 노고단까지 오르는데 숨 한번 가쁘던가?
덕유산이라... 곤돌라 타고 올라가서 아파트 몇 층 올라가는 정도나 될까,
그러고는 꽃핀 상고대로 인증샷~ 으그 얌체.
문자 그대로 해발로 쳐서 0m 수준에서 오르는 작은 섬에 있는 그저 그만한 산 오르기도 쉽지 않더라.
그런데 기왕 힘들이고는 동네 산 다녀왔다면 남들에게 자랑하기는 좀 뭣하거든.
에이, 낮은 산은 무엇이고 큰 산은 또 무엇이뇨?
박철 시인이 그러더라.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한 사내가
껌을 밟고 섰듯 우렁차게 먼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았으나
부러울 것 없네 손자 손녀도 우습게 매달리고
때론 사이클 탄 이가 우주로 떠오를 듯 달려나가기도 하니
언덕에 섰는 갈참나무나 자귀나무도 마음이 연해
별다른 벌레들 기어들지 않고
청설모며 족제비가 종갓집을 이루는 터
내가 오늘 먹을 걱정에 터벅거리며 산을 내려오자
산은 슬며시 나의 옷깃을 잡으며
곧 볍씨 뿌리는 들판이 될 것이라 귀띔을 한다
따뜻한 바람을 모아 군불 지피는
끝내 고향이 되어버린 아우 같은 산
머리 긁적이며 돌아보니 오솔길은 발장난을 치고
묵은 꽃향기 수북이 손등처럼 쌓여 있다
-‘개화산에서’-
등촌동에서 몇 달 살적에 아파트 뒤에 봉제산이라고 있었는데
얼굴 타지 말라고 철가면 쓴 용기병처럼 중무장한 아줌마들이 운동 되라고 휘두르는 주먹에 급소 맞지 않으려고
움츠리고 다녀오는 곳이었지만
낮게 깔린 큰 언덕쯤 되는 것도 정감 있더라고.
한양에 마천루 들어서기 전, 옛날 고릿적에는 봉화도 올리고 했던 데이고.
박철 군 노래에 좀 보태자면
왜 좋은 시냐 하면 시원찮아 괜찮은 것, 못 쓴 시가 잘 쓴 시.
大成若缺(대성약결)이니 大巧若拙(대교약졸)이니 大辯若訥(대변약눌)이니, 그거 다 맞는 말일세.
아예 낮은 산이 높은 산이라 할까?
최고남, 최고녀 아니라도 그대, 그리고 나~
보고 좋은 것 따로 있고
그건 거기 그대로 두고
해봐서 좋은 것
해봐서 아는 것
만만해서 좋은 것
또 해도 질리지 않은 것
그저 그런 산 다녀온 주제에 어허 그 사람 말도 많다.
워낙 굶었거든. 북한산 다녀온 게 일 년이 넘었으니.
워싱턴에서 보는 꽃들에 digitalis(foxglove)를 빠트려서 미안했네.
대표선수 급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