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1
비가 오니까 생각난 게고
그래서 ‘봄비’라는 말이 입밖에 나온 걸 뜬금없다 할 게 아니지.
화두로 받고 보니 가슴 설레는 밤이 되었다.
봄에 오는 비가 아니니
봄비라 할 수 없지만
봄을 재촉하긴 하겠어서
그냥 봄비라 하자고.
겨울이 아주 간 건 아니지
한 번 더 추위가 오고말고.
그래도 이 비에 언 땅 녹겠네
깊숙이 스며
정신 차리지 못한 뿌리를 간질이겠네.
우산 들고 다녔어도 펼친 이는 없었다.
는개랄까 적시기는 해도
무슨 하강운동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직한 부름
그윽한 입김
보듬고 토닥임
젖배 부른 아이처럼 잠들기.
정몽주의 시 한 수.
春雨細不滴 봄비 가늘어 방울조차 맺지 못하더니
夜中微有聲 밤 되자 가녀린 빗소리 들리는 듯 하다
雪盡南溪漲 눈 녹아 남쪽 시내 물 불어나고
草芽多少生 새싹 소복이 돋아나겠구나
어지러운 때에 강성 이미지로 절개를 돋보이자는 게 아니고
그런 젖어듦으로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들이 그립다.
점령군이 된 이들
‘운동권’이라는 딱지가 양도증서 쯤 되어
반동의 적산(敵産) 접수한다고 돌아다니는 꼴이 그렇지만,
한때는 그들의 함성에 귀 막고 “죄송합니다”만 연발했던 이들이
이젠 피해자가 되어 원망을 거품처럼 뿜어내는데,
그때 그 누구더라 양성우, 고정희, 김남주 같은 이름들은
그냥 시대에 어울리던 ‘고성방가 풍’이었을까?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고정희, ‘봄비’-
(뒤는 잘랐어, 고질의 구호 형이라서.)
눈부셔라.
그대 반짝이는 풀잎을 밟고
비 그친 강둑길 굽이돌아
오는 이.
잔잔한 물 위에
긴 그림자 드리우며
나란히 선 버드나무숲을 지나
손뼉 치며 오는
그대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구나.
-양성우, ‘비 온 뒤에’-
괜찮지?
남은 분들 이제 생소리 그만, 고운 노래 부르시기를.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으로 끝나니까 이젠 촌티가 덕지덕지인 듯 싶지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변영로, ‘봄비’) 있잖아,
이젠 그쯤의 음량으로 노래하면 좋겠어.
밤에 나가 좀 걷다가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1백50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가는
천상병이 맞던 비쯤 되는 걸로
눅눅해져서 돌아왔다.
‘주소불명’ ‘수취거부’ 같은 도장 찍혀 반송되지 않아서
대체 받기는 했는지조차 모를
편지를 더 이상 보내지 않겠지만,
그냥 잠들 것 같지도 않아서
몇 자 남겼다.
올해는 조선 땅에 꽃씨 뿌리고 모종할 수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