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에서

 

 

‘모란과 작약 사이’라고 한다면

모란이 피어 한참 자태를 뽐내다가 시들어버리고 나면

봉오리 맺고 대기 중이던 작약이 “그럼 내가 나설 차례가 되었나” 그러며 채비를 하는

말하자면 이미 갔고 아직 오지 않은 이중의 부재라는 공간을 가리키는 모양인데

그게 꼭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모란이 늘 먼저 핀다고 할 수도 없고, 모란과 작약이 경염(競艶)하듯 함께 피기도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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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이미 갔고 여름철에 들어선 어느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진 “그 하루 무덥던 날”

창덕궁을 들렀다.

기진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작약꽃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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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구별하냐, 초본/목본, 잎새의 모양으로? 그런 얘기 그만하자.

장점만 따서 더 예쁘고 병충해 적게! 그런 식으로 섞다 보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처럼 아리송해지기도.

그러니 구별 말고 “아 예뻐라!” 그러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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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 모양이 안 나오는 사족 하나 붙이는데... 왜 굳이 ‘목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있더라고, 내 참.

‘陜川’을 읽을 줄 몰라서 ‘합천’이라고 그러는 건 아니잖니.

‘牧丹峰’이라고 썼어도 ‘모란봉’이라고 읽던 걸.

제 것은 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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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을 ‘오월에 피는 꽃’의 대표 단수로 뽑으면 다른 꽃들이 얼마나 섭섭하겠어?

마치 봄꽃으로는 매화만 치듯 하는 그런 가르기, “하나 빼고 죄다...” 식의 배제는 지양할 악습.

 

신록과 어울리는 흰 꽃들, 그리고 꽃밭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자존심마저 놓아버리지 않은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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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 다 졌다고, 나무들마저 베어 없어졌다고 창덕궁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흥망(興亡)이 유수(流水)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ㅣ로다” 그럴 날 오긴 오겠지만

전각(殿閣) 사라지기 전에 방문했던 이들의 좋은 날이 잊힐 것이어서...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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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 주제에 궁(宮) 안에서 산다고 위세 좀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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