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혼자 떠남]
발발 떨며 나갔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투덜대며 들어오기.
그럴 처지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일탈의 유혹으로 오래 시달렸던 거지.)
하루만 가출하기로.
(아버님도 하루 정도야 괜찮으실 것이고.)
오밤중에 해변을 걸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장 폴 벨몽드나 입음직한) 연두색 바지가 젖을 정도의 경계를 따라.
갈기를 세우고 달려들어도
더 다가가지 않으면 발끝도 적시지 못한다.
날 좀 울게 해줄 수 없니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피하게 되더라는.
대실료 15,000원, 숙박료 23,000원 짜리라도 잘 고르면 그저 그만한 것 걸릴 텐데
뭐가 다 끈적거리는 것 같아 단잠자지 못했다.
아침, 새 날이니 불쾌를 끌고 갈 수야 없지
마침 좋은 만남으로 상쾌함을 회복했다.
쓸데없이 나이를 먹었으니 내가 형인 셈이지만
형 노릇 하기가 미안한 잘난 아우가 부인을 데리고 나왔다.
내외가 하루 종일 날 위한다고 날품 팔듯 수고했다.
동래 범어사를 보자고 갔는데
마침 초하루라 사람들이 많구나.
입구의 등운곡(籐雲谷)은 겨울이라 볼 게 없었다.
등꽃이 자운(紫雲)으로 골짜기를 덮을 때는 “아휴 정말...”이겠으나
해마다 큰 소나무(長松) 60여 그루가 덩굴의 목조르기에 죽어나간다.
일대의 소나무는 일부러 그렇게 가꾸거나 분재 다루듯 하지 않았는데도
모양이 등(燈) 같다.
사리탑 같다 하든지, 솜사탕 같다 할는지
보기 나름이니까.
일주문.
결구(結構) 없이 기둥을 세운 건축물이다.
출입하는 공간이 셋으로 나누어졌다.
(몰골은 그래도 속은 꽉 찬 문화재청장님의 안목 덕에)
뒤늦게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
아하, 이런 길이 있구나.
담은 문을 내기 위하여 있는 것.
그러면 담이 먼저였을까 문이 먼저였을까?
막는다기보다는 구별하기 위해서 담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교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문도 내야 했을 것이다.
산문(山門). 그도 고운 이름이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
자하문은 들어가는 문인가 나가는 문인가.
담 따라 걷는 길.
통과(通過) 없이 병행(竝行)해도 괜찮다.
배척당했다는 느낌은 없다.
고놈 보게, 작은 새(이름?)가 앞에서 까불대다가 잠시 쉬고 있다.
탑, 보물, 빠져나가지 못한 바람, 사람들...
일일이 인사할 수 없어서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