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꽃들 주인 떠난 땅에서
{저녁에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타자 연습하는 셈 치고 일없이 길게 된 글이니
읽을거리도 아니고... 그냥 제 잡기록입니다.}
(사진은 필자가 아니고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 H. H.)
해마다 종묘상이나 원예 클럽에서 내게 보내오는 목록이나 동호인 잡지가 백여 권은 족히 될 것이다.
그게 그냥 선전물이 아니라 백 쪽이 넘는 내용의 대부분이 꽃이나 채소 사진들이라서
웬만한 사진 잡지나 여인들을 드러내는 그림책보다 훨씬 아름답고 재미있다.
그러면 그들은 비싼 인쇄비와 송료가 드는 것들을 왜 내게 보낼까?
특별 관리하는 중요한 고객이기 때문이다.
왜 나를 우대하는가? 매출액을 올려주기 때문이다.
농장주? 아니다.
그렇지만, 뒤란에 작은 화단이나 텃밭을 가꾸는 보통 주택 소유자보다는 아무래도 더 많은 땅을 가졌거나
별날 정도의 광적 원예 취미를 지닌 자로 생각해주는 것 같다.
진상을 밝히자면(무슨 흑막이나 부도덕한 거짓말 시리즈가 개입되었다는 뜻은 아닌데),
나는 백 평 넘는 재배 면적을 가져본 적이 없다.
(모종을 내어 나눠주기도 하고, 임야에 들꽃 씨를 뿌린 적도 있고, 공동 경작하는 채전이 있지만,
그런 것들은 내가 소유하고 직접 관리하는 땅이 아니니까 제외하고 하는 얘기.)
그러면, 종자 구입에 얼마나 많이 투자하기에?
취미 원예 정도로 구입하는 꽃씨는 봉투 당 2불 전후이니까,
백 개-꽃 60여 종, 채소 40여 종-를 주문하면 200 불 정도 소요된다.
구근으로 심는 식물에 200 불 정도 별도로 들어간다.
(모종, 버섯 종균, 등 구입에 또 좀...)
사실 이만큼만 해도 2,000 평쯤을 꽃과 필수 채소로 도배하기에 남는 분량이다.
(나는 주로 Park's 나 Walter Stoke's 에서 구입했다.)
앞서 밝혔듯이 화초 카탈로그를 펴볼 때부터 이미 흥분상태인데,
배달된 꽃씨 봉투를 흔들면서 사각사각 소리를 들을 때쯤 되면 황홀의 극치.
다 심냐고? 아니.
무슨 신품종 실험 재배하듯이 모종 두어 개 낼 정도이니까
뜯었지만 남는 씨들이 많고,
개봉조차 안 된 봉투들도 해마다 남아돈다.
아내는?
봐준다.
그게 유일한-다른 ‘유일한’들이 또 있지만- 취미라는데, 어쩌겠는가?
(속으로는 “다 심지도 않을 것, 잘 가꾸지도 않을 것, 거두지도 못할 것... 돈은 돈대로 들고...” 할 것이다.)
올봄은 한국에 나와 있으니
봄볕 쬐며 흙 만지는 재미는 놓쳤다.
보는 기쁨이나 누려야지.
어느 아파트 단지라도 봄철에 진달래, 철쭉, 목련은 기본, 가을에 단풍, 은행나무, 감나무도 필수,
화단도 철따라 갈아 심어 놓으니
아기자기하고 참 보기 좋은데,
국광, 홍옥, 인도, 등 다 사라지고 부사(Fuji)가 평정했듯이
어디를 가도 다 같은 모양,
게다가 인공 조형의 노력만큼이나 자연미는 떨어진다.
캐나다 살 적 얘기.
워낙 겨울이 기니까 남부 온타리오라도 오월 말이나 되어야 튤립이 핀다.
향기는 별로이지만, 파스텔 톤의 색깔 변조는 얼마나 될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심었다 하면 단색 튤립만 학교 운동장 하나는 차지할 만큼 깔아놓으니
우와~ 그 규모라는 게...
그렇게 땅에서 피기 전에 ‘forcing bulb‘라 해서
억지로 집안에서 먼저 피게 할 수도 있다.
1981년 겨울, 마침 오두막집에 wine cellar로 쓰는 지하실이 있어서
나는 각종 튤립, 히아신스, 수선, 아네모네, 아마릴리스,... 등 백여 분을 만들었고,
12월부터 2월까지 꽃이 피는 대로 집집마다 한 화분씩 돌렸다.
그런데... 화분을 받는 순서, 어떤 꽃이 걸리는가에 사람들이 신경을 쓰게 되고,
그러다보니 애는 썼는데 기쁨의 전령(herald)이 되기는커녕 불화만 조장하게 되었다.
그 후로 내 꽃밭에 와서 얼굴에 철판 깔고 꽃을 꺾어가는 이들은 모른 척, 못 본 척 넘어가고,
찾아다니며 꽃을 나누어 주는 일은 그만 두었다.
아내가 혼자 지키고 있는 집 뜰에는 명자나무, 수수꽃다리, 꽃배(Bradford Pear),
빨간 밥알(Oklahoma Redbud) 꽃들이 피었다가 지고 있다고 그런다.
너무 더운 데라 튤립 등은 잘 되지 않는다.
꽃샘추위라나 그런 날 눈물 질질 흘리며 다니면서도
“When it's springtime in the Rockies I am coming back to you...
Once again I'll say I love you While the birds sing all the day...”
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Spring Garden Avenue라는 거리에 있는 내 옛집에 피던 튤립을 떠올린다.
또... 심지 않고 내버려둔 꽃씨들...
너무 미안하다.
이제 어떻게 해줄 수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