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산책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4. 7) 서세(逝世) 170주년 기념행사가

경기문화재단과 다산연구소 주최로 남양주시 능내리 다산문화유적지에서 있었다.

“실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주제로 준비한 제1회 ‘실학산책’이다.


(마침 강 건너면 내 고향이기도 한 데라서.

고개가 있으니까 마재(馬峴里)라 했을 것인데

이제는 무슨 고개 같은 것이 없다.

그때 능내 간이역에서 내려 그 고갯길 지나 소내로 갈 때에

나루 조금 못 미쳐 밤나무 몇 그루가 있었는데

꽃 피는 철에 거기를 지나가자면 묘한 냄새가 났다.

젖 빨던 아이가 고개를 떨궜는데도 여미지 않고

생글거리며 “되련니~임”이라고 부르던 아줌마에게서 나던 냄새 같은.)

 

 

A2[13].jpg

 


묘제가 있은 후에 다산문화관 강당으로 옮겨 강연회가 있었다.

손학규 지사의 축사와 박석무 소장의 인사말

임형택 교수, 유홍준 문화재청장, 정관용 시사평론가의 강의가 따랐다.

사계의 권위인데다가 말씀 잘하시는 분들이니 뭐라 하지 않겠다.

(손지사는 동문수학인데 오래 보지 못했다.  한가한 자리가 아니라서 인사 없이 헤어졌다.

그리고 그 아까운 유홍준.  날개를 붙여줬으니 일 많이 하기 바라지만...)

 

 

   A3[10].jpg   A4[8].jpg

 

 

후에 소리꾼 이규호의 창작 판소리 ‘다산 정약용 전’을 듣고

어름산이(줄타기 재인) 권원태의 재주를 보았다.

(‘왕의 남자’ 덕에 귀하신 몸이 되었는데, 용케 시간 내주었다.)

‘덤’ 같은 끼워 팔기였는데,

아나고(안 하고?) 회처럼 그것 바라고 온 이들도 더러 있을 것이고.


 

A5[8].jpg

 

A6[6].jpg

 


이런 날 안할 소린데...

부인 풍천 홍씨와 같이 누운 자리를 보면서

홍임이 모녀는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나서...

(그 왜 ‘지독한 사랑’ 홍랑은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곁에 자리를 얻었거든.)

 

 

A1[12].jpg

 

 

홍임이 모는 강진에서 다산을 지극정성으로 모신 여인이었다.

유배가 풀려 본가로 가며 데려갔을 것인데, 곧 내침을 당했다.

(그럴 수 있는 일.  이해가 가고도 남지.)

그런데... 그 후 그 아저씨가

다산초당을 홀로 지키던 여인의 안부도 물은 적이 없다고 해서...

 

 

A7[7].jpg

              

                               A9[8].jpg

 

보정산방A[1].jpg

 

A8[5].jpg

                                                다산초당에서 내려다보는 강진만이 참 곱다.


 

이엉은 새로 얹었는지

축대의 돌들은 무너지지 않았는지

못 속의 잉어 두 마리는 얼마나 자랐는지

그런 걸 캐묻는 자상함이 돋보인다면

“그래 홍임이는 얼마나 컸는가”쯤  한 번 물었어야 하는 무정함도 한번 짚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해마다 새로 돋는 찻잎 따서 ‘본가’에 보냈다고 한다.

그걸 두고 지은 것인지 시 한 수 전해지기는 한다.


    雁斷魚沈千里外

    每年消息一封茶


그런 일 때문에 다산 선생의 인격에 흠결(欠缺)이 있었음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고,

그 시대의 이런저런 여인들의 한과 굴레, 인간들의 얽힘이 무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가 뭘 풀어줄 것도 아닌데.)

 

 

A10[6].jpg

                                                           생가 일부를 복원했다고 그런다.


 

‘실학산책’은 아니었구나.

그냥 봄나들이 다녀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