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다하면
초록 + 노랑 = 연두, 초록 - 노랑 = 파랑, 초록 + 초록 = 진초록, 초록 - 초록 = 무색
다른 건 뭐 숲을 보면 금방 알만한 얘긴데
초록에서 초록을 빼면 무색이라? 그건 좀 설명이 필요하겠네.
우선 ‘무색’의 뜻.
첫째로는 “물감을 들인 빛깔”이라는 뜻, 여기서는 그게 아니겠네요.
다음에 ‘무색하다’는 말을 하잖아요?
“겸연쩍고 부끄럽다”거나 “본래의 특색을 드러내지 못하고 보잘것없다”는 뜻으로 쓰이지요.
것도 아니겠네.
그러면, “아무 색깔이 없음”? 네 맞았어요.
문맥에서 그런 뜻으로 쓰였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그래도 석연찮겠네.
그러니까 여름 가고 나뭇잎 떨어지고 풀들이 시든 숲에서 초록을 보기 어렵다고 해서
색깔이 없다 할 수 있냐는 얘기겠지요?
초록이 좋은 사람에게는 초록이 사라지면 아무 것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거라는 뜻으로 새겨들을 수?
이렇게 비유하기는 좀 그렇지만...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아니 세상에 여{남}자가 천지삐깔인데...” 그래주면 어둔 세상이 광명천지가 되겠냐고요?
좋아하는 게 사라지면 남은 게 있다 해도 있나마나, 그러니 없는 셈이지요.
괜히 나대는 것 같아 한참 망설이다가 얘긴데...
‘無’니 ‘空’이니 굉장히 형이상학적인 개념 같지만, 허허...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고, 사유의 대상은 어떤 형태의 있음이니까
“없음이란 없다” 정도로 해둘까요?
‘空’이란 ‘빔’ 아니겠어요?
‘眞空’? 공기조차도 없는 깡그리 빔? 그래도 ‘아주 없음’은 아니지.
{‘진공상태’는 어떤 형태의 ‘있음’을 가리키는 말.}
비어있다고 없는 게 아닌, 비었기에 가득 찬
저기 하늘 좀 봐.
빔은 그득함(滿), 그래서 그윽함(幽), 그윽하면 어둑하기(玄)도 해서 깊고 오묘함(幽玄).
빔은 아무 것도 없다기보다 섞인 게 없다는 뜻, 섞인 게 없으니 맑겠네.
가진 게 없으니 밝겠네.
안팎이 따로 없어 숨길 게 없겠네.
묶이지 않아 自在.
신학용어 ‘kenosis’를 어렵게 여길 것 없고 ‘빔’인데
무슨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는 건 아니지만 빔은 더 빔을 향하여 나아가니까 ‘비움’이라 할까
영어로 옮기기도 그렇지만, ‘self-emptying’ 쯤으로.
{Cf. “자기를 비어...”, 빌 2:7}
그러면 그건 聖賢뿐만 아니고 모든 존재의 나아갈 길이겠네.
뭐가? 빔.
존재(有)는 그냥 ‘있다’이기보다 ‘이다’이거든.
‘이다’는 ‘이다’로 남지 않고 ‘되다’라는 운동인데
‘되다’는 ‘이다’에 이르면 다 이룬 셈.
‘되다’ 없이 ‘이다’ 없고, ‘되다’는 ‘이다’가 ‘이다’로 가는 움직임.
(설명하다보니 얘기가 이렇게 되었지만) 무슨 존재/생성과 변화라는 이분법으로 가릴 것도 아니고
緣起法을 들먹일 필요도 없네.
자라나서 다 자라면{이르면} 이룬 것인데
이룸(成就)은 자체로 남지 않고 썩거나 변질하며 解體하는데
부패의 부산물이 악취냐 세월의 향기이냐에 상관없이
부패 없이는 용도 폐기된 조형물과 시체가 쓰레기더미를 이루는 게 문제가 아니고
生命-살아 이어가는 것-이 섭취할 것이 없단 말이지.
그러면 ‘그냥 있음’이 ‘살아있음’을 부정하는 최악의 ‘없음’(無化)이 되고 만다고.
이렇게 쉬운 이치를 모르겠다고 할 사람들이 없지 않겠어서
골치 아픈 사람들을 숲길로 초대합니다.
눈 남, 움 돋움, 싹 틈 같은 게 보이나요? {“그건 봄에나 그렇지” 하더라도 보긴 봐서 알지요?}
그것들이 자라나는 것도 보이나요?
피어나고 열매 맺는 것도 보이나요?
열매는 태어남의 씨앗이라 하고, 그러면 떨어진 잎과 마른 풀들은?
자람의 거름이지요.
지금은 초록세상이지만
초록이 지치면? 단풍 들겠네.
그마저 사라지면?
애초에 ‘無色’이라고 그러는 바람에 얘기가 길어졌는데
그걸 ‘無彩色’으로 이해했더라면 엉뚱한 데로 나아갈 필요가 없었을 텐데요.
무채색은 “色相과 彩度가 없고 明度의 차이만 있는 색”이라는데
아 그건 모든 색들을 모은 것, 모든 색들로 나뉠 것, 모든 색 중에 으뜸 아닌가요?
해서 숲은 겨울이 와도 괜찮고
겨울 지나도 숲은 또 숲이고
겨울, 그게 뭐 그리 겁날 것도 아니고...
많이 기울었지만 아직 여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