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김
항암치료 받는 이웃에게 들렸다가
한 줌 남은 머리카락에 눈이 가면서
내 머리로 손이 올라가 쓸어보게 되었다.
갈퀴로 가랑잎 긁는 것 같은 느낌은 당최 없었지만
더 옅어져서 숱이랄 게 남지 않았구나.
성김.
있을 자리에 많이 남지 않았다면
아까운 것을 잃은 셈이지만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솎아주어서이기도 하니까.
줄어드는 건 다른 게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잠이 줄어들면 근심이 많아지듯.
[일찍 잠들고 시나브로 눈 붙이는 이들이
동트기 전에 기척을 내는 바람에
난 새벽잠 아주 반납해버렸다.
만성적 수면부족으로 팽팽해진 신경줄을
코고는 소리 마다않는 이의 무릎베개 위에 풀어놓고 싶다.]
깨어있는 시간이 길면 쓸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얘긴데
생산성은 저하되고
턱없이 그리움만 키우게 되더라니까.
연민과 자기비하만 자란다는 건 큰 수치.
부어도 길어 부어도
밑 빠진 독
차오르지 않아
온몸으로
바닥 막아 줄
순한 두꺼비 한 마리 없나요
-조성심, ‘그리움 잠재우기’-
없어.
그러니 일을 늘이게.
성긴 게 좋기야 하겠는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말이지)
골다공증 같은 것 그리고
뇌세포가 성글어지면
성긴 게 좋지 않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겠네.
그대와 나 사이 오가는 걸음 성글면
버성겨지다가 남남 되겠네.
그렇지만
성기다는 건 아직 남았다는 뜻이기도 하겠어서
더 좋은 것으로 채울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해서
사라져감만 탄식할 건 아니라는 얘기.
여우비처럼 오후에 잠깐 지나간 성긴 빗발에
초목이 금방 푸르러지더라.
뭘 막자는 게 아니고
넘어 들어올 수도 넘어갈 수도 있지만
모양새로라도 경계는 나타내자는
싸리 빠져 성긴 울타리
썩 보기 좋던 걸.
울고
웃고가
참 가벼운
아이
그 가벼움에 더러 위로를 얻겠고
오판한 이에게는 상처가 되겠으나
나도 그렇게 착했으면
연애가 잘 풀렸으리라
(이 나이쯤 되어)
성글지만 정교하게
베 짜듯
(그래도 한마디 더하고 싶으면)
촘촘해도 숨 막히지는 않게.
고창 보리밭
배를 매기도 하고.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장석남, ‘배를 매며’-
맨 것 풀어 밀기도 하고.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장석남, ‘배를 밀며’-
장흥 화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