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 다녀오는 길에 잠간 정원에 앉아
나희덕이 말한 ‘소만(小滿)’도 지났지만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아직 짙푸르다 할 수 없는
낙엽송 새순 같은
알 박히기 전 완두 깍지 같은
그런 빛을 쏟아 부은 때에
죽음을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그러니까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쯤 되어서야 할 말이지만
인동 냄새에 어찔하다 보니
그런 쪽으로도 생각이 미쳤는가보다.
(웬 인동, 소독약 아니면 마취제 냄새일거라.)
조붓한 흰 꽃 사이로 희끔한 얼굴 흘긋 보였는가 싶더니
그렇게 연출한 것도 아닐 테고 보호색이라 드러나지 않는가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꼼꼼히 챙겨보지 않은 것들이 아련한 영상으로 인화되면
괜한 그리움에 마음 시리게 될 것이다.
중환자실 병상에는 웬 줄이 그리 많은가
명줄?
줄을 잘 잡아야?
다 소용없는 짓.
버들가지 천만 실이라도 가는 사람 못 매더라.
돌배기 아이 줄 매달고 힘든 기색 없이 자고 있어
바라보는 부모 얼굴에도 안쓰러움이 없다.
옆 침대 아저씨 석 주 동안 깨어난 적 없는데
아내와 딸이 짧은 면회시간에 수염과 손톱 깎아드리고
조카사위쯤 되는 사람이 듣고 있냐며 기도한다.
이렇게 끌 필요 있을까
“최선을 다했습니다만...”이라는 말하기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그러며
수동적으로 견뎌야 하는 건지?
가족대기실에 기거하는 최고참 아줌마
웃으며 떠드는 게 장하다 싶을 때쯤
눈물 쏟아내기도 한다.
“내일 퇴원하게 되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하고서
주사 한 대 맞은 게 잘못 되어
혼수상태로 돌입, 그렇게 칠 개월이 됐단다.
그 많은 치료비를 어떡할 거냐니까
반만 내기로 했다고.
아니 그럴 게 아니고 의료사곤데 고소는 생각해봤냐고?
“선생님 얼굴을 보니 차마 그럴 수 없었어요. 나름대로 잘해주셨는데...”
좀 있다가 덧붙였다.
“그 의사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돌아다니고 나를 피해 다니는 것 같아
이젠 미워졌어요. 뭐라고 일러주지도 않고...”
예까지 오는 동안 몇이나 만났는지 다 기억나지 않고
그땐 흘리고도 아까운 줄 몰랐던 그
그 사랑(이었던가?)이 큰 금덩어리였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만 챙겼더라도...” 라는 후회.
(놓친 고기는 커 보이는 법.)
네게로 흘러가겠다고 그럴 때
아무 말 없어서
기다리겠다는 줄 알았지.
와보니 없어
또 가긴 하겠는데
수량 줄어들어
닿을지 모르겠다.
(구정물 들어오는 것 다 받아들이면
흐름으로는 남겠지만
그때 가서 알아보지 못하겠다고 그럴 것이다.)
그런 동안...
옆방에서는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동의했다.
“허물까지도 아름다웠다고 그러자.”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이성복,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Swan of Tuone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