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1)
초록의 극성(極盛)
이제 숲은 길마저 덮이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깊은 데로 갈 수 있다.)
물은 명랑함을 잃었지만
더 넉넉해졌다.
수국이 피기 시작하면 여름이지.
꽃 빛이 바뀐다고 변절(變節)을 추궁하지 말기 바란다.
발이 닿는 것들, 몸 타고 지나가는 것들 때문에 안색이 바뀌어도
그는 그이다.
그대로 아니라도 그의 잘못은 아니다.
(하늘은 늘 거기 있지만
구름이 지나가지 않으면 있는 줄도 모른다.)
파란 문으로 들어갔다고 안도 파랗지는 않을 것이다.
노란 문도 그렇고 분홍 문도 그렇다.
겉 보고 속는 게 아니다.
속이자고 칠하는 게 아니다.
겉은 가꾸기 쉬우니까 겉이라도 단장하자는 것이다.
과장(부풀리기), 변장, 위장이라 그러지 마.
화장하는 게 더 낫다.
빛이 흩어지면 빛깔이 되고 빛깔을 합하면 어둠이 된다.
붓을 빨거나 팔레트(調色板)를 씻은 물은 검다.
‘세상(시간)의 종말을 알리는 사중주’를 들었다.
(11일 예술의 전당에서 한국 페스티발 앙상블 연주)
아픔보다 더 괴로운 권태, 심심함을 견디지 못해 저지르는 테러,
폭력으로 인한 상실, 잃음 때문에 슬픔.
그렇지만 슬픔은 설움으로 고여 있지 않더라.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종말을 알리는데 무슨 놀람이나 두려움이 없다.
(카바티나 풍의 노래, 경쾌한 춤이 있다.)
끝은 시작이니까.
끝은 어둠의 끝이니까.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빛이 넘치면 어두운 구석은 없을까?
그림자도 없을까?
창조된 세계는 어둠 있어 빛이 좋고
슬픔이 많아 기쁨이 귀하지만...
빛만 있으면 빛이 좋을까?
사랑은 슬퍼하면서 사랑같이 되는 것이려니.
메시앙(Olivier Messiaen)은 그 곡을 수용소에서 작곡했다(1940년).
포로들 중에 음악을 아는 이들이 줄 없는 첼로, 망가진 피아노, 그런 것들로 연주했다.
혼란, 폭력, 학대, 죽음을 기다림, 절망하지 못하는 절망, 그런 가운데
세상 지나고 변할지라도
영원하신 주 예수 찬양합시다.
(이 사진에 그의 친필 서명을 얻었지.)
성을 초월한 남녀가 희롱하며 지나간다.
새가 날아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