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통곡
(그러고 보니 6.25 쉰 여섯 해 지난 기념일이구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이라는데, 다 잊고 말았다. 그 노래 가사는 잊어야지만, 날은 잊지 말아야지.)
오늘은 주일, 봉수교회-수리 중-와 칠골교회에서도 예배드릴까?
공화국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다. 그러니 예배당을 지었겠지?
어제 칠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는데 북측 실무자들이 아니라 다른 임무를 띈 것 같은 두 사람이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강단을 가로질러 다니고 담임목사에게 험한 말로 꾸중하며
회중을 노려보았다.
우리 쪽 단장과 실무자들은 애가 타서 빨리 끝내라고 사인을 보낸다.
설교 시간으로 딱 5분 배정되었는데, 서자마자 손가락 하나를 든다. 일분으로 끝내라는.
일분이 되자 내려오라는 사인. 몇 마디 더한 것 같다. 나중에 물어보니 2분 10초였다고.
어느 사회나 꼴통은 있다. 꼭 저처럼 해야 충성하고 원칙에 충실한 줄 아는, 변통성은 불법, 변절, 배반인 줄
아는. 그런 사람들 상판엔 보통 ‘힘들어’라는 주름살이 새겨진다. 어떤 표정을 짓는가에 따라서 어떤 얼굴인가가 결정될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그가 충성하는-충성한다고 믿는- 조직에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
이하 준비했던 원고 전문이다.
본문: 창세기 45장 1~8절
제목: 만남의 통곡
그간 북남에 떨어져 살았던 가족들이 만날 수 있었던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만났다고 합하여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울면서 만났다가 또 울면서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아직 살아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아니고 한 곳에서 살면서도 헤어진 지 수십 년에 이르도록 만나지 못한 이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얘기 새삼스럽게 들먹이기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지요?
이것도 좀 지난 얘기이긴 하지만, 남쪽에서는 1983년에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라는 기획물이 있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나이 지긋한 이들, 사회적 지위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이들이 무슨 약장수나 Sandwich Man이 광고물 부착하듯 등과 배에 인적사항을 써 붙이고 초조한 표정을 띄고 초라한 모습으로 만남의 광장에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다가 제 차례가 되고, 서로가 내세운 고향, 나이, 이름, 헤어진 장소 등이 맞아떨어지긴 했는데, 정말로 앞에 있는 이가 과연 꿈에도 못 잊을 헤어진 혈육인가를 조심스럽게 확인할 때에 그 생방송을 시청하는 많은 사람들은 당사자도 아닌데 손에 땀을 쥐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지켜봅니다. 어떤 가족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배꼽 곁에 뜸자리가 있느냐고 물으니까 아들이 허리띠를 끄르고 보여주자 그제야 상봉의 눈물을 흘립니다. 어떤 사람은 고향에서 부르던 소도둑이라는 별명으로 혈육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혹은 콧잔등의 마마자국이나 머리카락을 헤집어 낫에 찔린 흉터를 살펴보기도 하고, 해방 전에 주고받은 편지의 사연을 기억해냄으로써 “그래, 네가 맞구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난날의 쓰라린 상처와 보기 싫은 흉터와 원망스러웠던 아픔, 듣기 싫었던 호칭이 오랫동안 갈리었던 핏줄을 연결하는 소중한 징표가 된 것을 생각해봅시다. 역사도 그런 것 아니겠는지? 더러 다툼이 있었고, 그래서 아픔과 미움이 있었고, 그리운 만큼 원망도 있었지만, 그 비극, 그 상처의 아픔과 기억이 흔적으로 남아 앞으로 무궁하게 이어질 이 땅의 역사에서 우리의 뿌리를 찾고 넋을 찾고 새 길을 찾고 한 나라 한 겨레 다시 갈라질 수 없는 한 몸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증표가 될 줄로 믿습니다.
꿈꾸는 자 요셉이 그 뼈저린 고난과 이유를 알 길 없는 불행과 배신의 연속 안에서 그를 붙드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자각할 때에, 그토록 원망스러운 형들을 껴안고 방성대곡하였던 것처럼, 23년 만에 외국 고센 땅에서 부자 상봉한 야곱과 요셉이 그 목을 안고 울었던 것처럼, 또 아버지의 집에 돌아온 탕자가 맞아주는 아버지를 안고 울었던 것처럼, 우리 다른 소리 할 것 없고 나를 찾으시는 주님을 안고, 그리고 헤어졌던 형제를 안고 울어봅시다. 그래서 만남의 울음, 기쁨의 울음이 용서의 울음, 감사의 울음이 되게 합시다.
제가 자란 곳이기도 한데, 서울에서 좀 떨어진 데에 ‘양수리’라고 있어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한다고 해서 양수, 순 우리말로는 ‘두물머리’라고 그런 거지요. 오늘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 합하면, 그러니까 대동강과 한강이 합하여 두물머리가 되면, 그것은 탄탄한 큰 강으로 흐르면서 주변을 오곡백화만과의 땅 되게 하며, 그 땅의 소산은 넉넉하며, 그 땅에 사는 백성은 어질지만 힘과 지혜가 있어 세계열방에 덕을 끼치게 되리라. 그것은 이루어질 꿈이며,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한번 확인시키시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보여요? 들려요? 백두와 한라가 껴안고 춤추는 것을. 낙동강과 압록강이 오줌 멀리 싸기 하듯 장난하며 떠드는 소리를.
오늘 우리가 좀 뿌려야 할 겁니다. 우리가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시작한 것이니까. 그러나, 큰 강은 여러 지류가 합치며 이루어지지요? 만남의 눈물, 화해의 눈물, 용서의 눈물, 기쁨의 눈물이 합쳐지면서 큰 강이 되어 흐를 때에 혹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이 메시지가 민족 화해와 조국 통일에 방해가 되는 것인지,
공화국-그쪽 정서를 고려하여-의 체제와 통치이념에 도전하는 것인지 예배를 방해했던 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의 행동을 장군님이 칭찬하실 것인지.
털 깎이려 끌려가는 양처럼 순한 눈망울의 두 목사님이
떠나는 우리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