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의 빛
욕창을 걱정하시는 어른 앞에서 드리는 기도:
“사방을 휘휘 둘러볼 수 없도록
꼼짝없이 하늘만 쳐다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
(아멘 없는 게 당연하지.)
구름은 서서 보는 게 아니라서 누웠다.
반듯이 누워서 보는 하늘
무슨 회오리바람 같은 게 일어 나를 올려 보내고
(불 병거 타고 올라간 엘리야 같지 않더라도)
저 푸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가
러시아 병사들은 묻혔으니 하늘 보지 못 하겠네
내 하는 말 알아들을 수 있으면 전해주련만.
(이미 하늘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안다면 실례)
비 맞다가 비 되고
햇볕 쬐다 햇볕 되고
풀밭에 누웠다가 풀 되고
적셔지기도 적시기도
흩어지기도 모으기도
갉아 먹히면서도 자라 씨 맺기도 하면서
내가 어찌할 수 없고
내 맘 안 알아주고
내 호소에 귀 막은 존재를
내 안에 품고
나로 만들어가기
나도 나 아니게 되기
{보통 마른 땅인데 비 온지 얼마 안 되어 축축하다.
일어나며 둘러보니 타래붓꽃이 지천이다.
꽃 없는 데 없다.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
숨지 않았는데 눈에 띄지 않았던 게지.}
그까짓 한 줄 팬레터 답장 같은 글자 몇 개가
하도 맹렬하게 춤추기에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후
심계항진이랄까 부정맥 증세가 있었지만
그런 두근거림이야 네가 준 아픔은 아니니까.
바람을 핑계대고 다가가서 기대고
바람이 세게 분다면서 비비고
네가 밀어낼 때에 바람 탓인 것처럼 떨어져나가고
일단 멀어지면 그런 거지
아득바득 애면글면 애걸복걸 안절부절 오매불망
(가만, 지금 사자성어 맞는가)
그런 것 다 지나가고
이제 보니 욕심이었던 것 털어버릴 수 있으니
고맙고 대견하다.
러시아 행 열차, 너무 느려 모스크바까지 엿새 걸린다고.
아주 가는 건 아니라서
꽃 피더니 꽃이 집니다
(... ...)
사람 살아가는 일이 다 그렇다고
보지 않으면 잊혀지다가
불현듯 또 그렇게 생각나다가
잊어지다가 쓸쓸히 지워지다가
다시 또 잠 못 드는 날 있겠거니
-홍수희, ‘꽃편지’-
풀잎 위에 이슬이 있듯 내가 당신 곁에 있고
풀잎 끝에 바람이 오듯 당신이 내게 오므로
들길을 걸어 돌아오는 오늘 같은 밤은 혼자도 넉넉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당신 곁을 떠나야 하지 않나 자꾸 생각듭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당신에 대한 집착이 되어
사랑하는 마음보다 욕심이 커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당신을 향해 걷는 길만은 언제나 밝게 밝혀 두고
당신 아닌 큰 것을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오직 당신에 대한 설움에만 내 마음을 매어 두고
내가 지고 가야 할 나의 십자가는 외면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도종환, ‘이제는 잊히리라 합니다’-
아주 잊을 수야 있나요?
작년에 지던 감꽃이 올해 또 시나브로 지듯
어제 반짝이던 별들이 오늘 밤
또 반짝이듯
세월은 아주 가지 않는 법,
-오세영, ‘어제 반짝이던 별들이’-
고개마루나 마을의 경계에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안녕히 가세요“라는 표지. 하늘색은 행운을 불러온다고.
아픔을 나눠서 아프고
슬픔을 같이 먹어서 슬프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
편한 것.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낯선 손님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조금씩 시들어가듯이
언제 헤어졌나요
미워하나요
다가가지 못하지만 그저 그만한 거리를 두고
늙어가는 모습 보며 기도하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