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과
삐끗한 허리
걸음 옮길 때마다 에구구 소리 절로 나지만
신음(呻吟) 낸다고 아픔이 가시는 건 아니니까
새나오지 않게 꾹 다물고
가던 길 그냥 간다.
어쩌다가 경인미술관 뜰에 이르러
하늘을 우습게 알고 키 돋움 하는 능소화(凌霄花)를 꾸짖고
-인석아, 뻗쳐봤자 지주(支柱) 높이가 네 키인 것을-
떨어진 감들, 알밤보다 커진 놈들, 에잇 못난 놈들
밟아 으깨지 않으려다 내가 넘어졌다(fall down).
맘이 안 좋다.
꽃피고 암술과 수술이 살짝 기댔다가 비볐으면 열매 맺자는 일이었을 터.
아기감들 떨어져 포도(鋪道)를 어지럽히는 것 보기가 그렇다.
봉오리조차 다 피는 건 아니다
연(緣)이라는 게 그렇지
시작했다고 다 끝까지 가서
곱게 물들고 잘 익어 맛 들지는 않을 것이다.
시원찮은 건 미리 떨어지는 게 낫다
다른 열매들에게 그리고 나무에게도.
(딱 하나만 얻겠다는 건 아니지만
꼭 하나는 가져야겠지
그건 있어야지.)
“너 닮은 여자 찾기는 장터에서 국수집 찾기보다 쉽다”고 짖었지만 (마음속에서)
그 많은 국수집 다 다닐 것도 아니고 한 군데 정하고는 노상 거기 다니게 되니까
단골집에서 서운한 일 있었다고 “에잇 더러븐... 다시 가나 보레이” 할 것 아니다.
또 그렇지, 닮은꼴이야 있겠지만 (많지) 그는 단 하나니까.
(‘Fallen Fruit’ by Mark R. Hall)
안될 것 뻔히 알면서 괜히 붙잡고 있던
그 긴 허송세월의 억울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면...
감나무 잎새를 흔드는 게
어찌 바람뿐이랴.
감나무 잎새를 반짝이는 게
어찌 햇살뿐이랴.
아까는 오색딱다구리가
따다다닥 찍고 가더니
봐 봐, 시방은 청솔모가
쪼르르 타고 내려오네.
사랑이 끝났기로서니
그리움마저 사라지랴.
그 그리움 날로 자라면
주먹송이처럼 커갈 땡감들.
때론 머리 위로 흰구름 이고
때론 온종일 장대비 맞아보게.
이별까지 나눈 마당에
기다림은 왠 것이랴만,
감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그래 그래, 밤이면 잠 뒤척여
산이 우는 소리도 들어보고
새벽이면 퍼뜩 깨어나
계곡 물소리도 들어보게.
그 기다림 날로 익으니
서러움까지 익어선
저 짙푸른 감들, 마침내
형형 등불을 밝힐 것이라면
세상은 어찌 환하지 않으랴.
하늘은 어찌 부시지 않으랴.
-고재종, ‘감나무 그늘 아래’-
좋은 만남도 맺어지면 아프다.
뭐가 좋은 만남인데?
끝까지 같이 가는 것.
그러니 계속 아프겠네.
그때 침범하고 배척하며 소용돌이치고 화해했다.
지나가고 나면 폭풍은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연이 있으면 또 뵐 수 있겠지요” 그러길래
“두 말하면 이빨 시리지” 심드렁히 대꾸했지만
못 보는 동안에도
잠복 내재한 게 준동(蠢動)하는 줄
내 다 알고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