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겠나 그래도 사랑인 것을
[박재삼 짜깁기]
주일이라고 TV 앞에 앉으신 가친과 함께
쏟아지는 폐수에 흠뻑 젖었다.
대포동 2호 쯤 되는 운반체에 다탄두 장착하여 발사하는
잘 생긴 목사님들 뒤에서
어릿어릿하는 저 그림자들은 무엇인고?
어쩌다가 마주치면 한숨 나오게 하는 얼굴들 고정희, 천상병, 또 박재삼, 히히
아니 그 바보상자 속에서 뭬하는 게야요?
쉬잇!
정신없이 달려온 강물이
산굽이 밑을 핥으면서 숨 좀 돌리자고 그럴 수도 있지만
전립선 앓는 이의 오줌발 같아 하는 둥 마는 둥
아주 끊어진 건 아니지만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새삼스레 “이제 그만!” 그러면 참 우스운 거지요.
“못 먹어도 Go!”는 아니지만
갈 때까지 가자는 얘기겠지요?
어쩌겠나 그래도 사랑인 것을.
(그림: 장태묵)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아득하면 되리라’ 부분)
지독하지 못해서
지독하게 사랑하다가
지독하게 끊고 나서
지독하게 슬퍼할 만큼
지독하지 못한 슬픔
어쩌겠나 그래도 사랑인 것을.
“사랑은 만 번을 해도 미흡한 갈증”(‘나무’)이거늘
뭘 얼마나 했다고
세레나데 듣기나 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작은 파문 한번 일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걱정이구나.
사랑이여
나는 그대에게
가까이 가려고 한 욕심이
그대의 그지없고 조용한 가슴에
상처만 남겼느니.
(‘나룻배를 보면서’ 부분)
(그림: 장태묵)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萬갈래”(‘내 사랑은’)
밤은 그랬고
오늘은
“오늘은 귀를 뜨고 마음을 뜨고, 아,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
또는 대님 푸는 소리로까지 어여삐 기삐 그려낼 수 있는”(‘매미 울음에’)데
누가 이런 날 후회하라고 그랬는지
사랑이여
나는 왜 그 간단한 고백 하나 제대로 못하고
그대가 없는 지금에사 울먹이면서, 아, 흐느끼면서
누구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할 소리로
몸째 징소리 같은 것을 뱉나니.
(‘갈대밭에서’ 부분)
아 글쎄 이 좋은 날 말이지
장마라고 해놓고도 특별한 은총으로 뭉게구름 띄웠는데
사랑도 어쩌면
그와 같은 것인가,
소나기처럼 숨이 차게
정수리부터 목물로 들이붓더니
얼마 후에는
그것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맑은 구름만 눈이 부시게
하늘 위에 펼치기만 하노니.
(‘매미 울음 끝에’ 부분)
Dog day afternoon에는 과일이나 나누어 먹자고
나갔다가
사랑하는 사람아,
네 맑은 눈
고운 볼을
나는 오래 볼 수가 없다.
한정없이 말을 자꾸 걸어오는
그 수다를 당할 수가 없다.
나이 들면 부끄러운 것,
네 살냄새에 홀려
살연애(戀愛)나 생각하는
그 죄를 그대로 지고 갈 수가 없다.
저 수박덩이처럼 그냥은
둥글 도리가 없고
저 참외처럼 그냥은
달콤할 도리가 없는,
이 복잡하고도 아픈 짐을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여기 부려놓고 갈까 한다.
(‘과일 가게 앞에서’ 전문)
(길어져서 이제 그만 하련다.
나가면 그만이지 예까지 따라와서...)
(그림: 이현)
내가 네가 아니어서 미안해할 것 아니고
네가 내가 아니어서 슬퍼할 것 없고
저 보색 대비 같은 것
대치는 사라지지 않지만
더러 침입과 충돌도 있겠지만
바라보면서 미워하지 않고
어쩌다가 섞인 것을 기뻐하고
헤어져야 한다면
눈 틔우고 망울 터지고 꽃 피고 씨 맺힌 다음에야
싹싹하게 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