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1
‘황혼(黃昏)’이라 하면
‘해가 지고 어둑어둑할 때’나
비유적으로는 ‘쇠퇴하여 종말에 가까웠음’을 뜻하는 말이겠다.
비슷한 때를 가리키는 말들로 땅거미(薄暮), 해거름, 석양(落照 혹은 晩陽으로도) 등이 있다.
그게 괜히 ‘가슴 쏴 하게’-쓰는 사람 있어 그런가 보다 하는 말- 만드는 말이다.
황혼은 ‘잠깐’이다.
그리고는 끝이다.
{그게...
드물지만 오래 가는 수도 있거든.
자친(慈親)은 외국에 나가 있는 아들에게 가족의 근황을 알리는 수적(手迹)에서
“외할머니는 서산낙일(西山 落日)이시다. 기운 없어 가만히 계신다.” 그러시고서
몇 달 후에 암으로 별세하셨다.
외조모는 십년쯤 더 사시고 102세에 돌아가셨다.}
2
일정의 암울한 시대에 두 시인이 같은 제목으로 시를 썼는데
(먼 훗날 무슨 ‘역사 바로 잡기’-우습지도 않아-하는 사람들에게도 걸리지 않을 분들이다.)
톤은 전혀 딴판이다.
비교하거나 그러지는 않겠고
조금 떨어트리고 간다.
고향이여! 황혼의 저자에서 나는 아리따운 너의 기억을 찾어 나의 마음을
전서구(傳書鳩)와 같이 날려보낸다. 정든 고삿. 썩은 울타리. 늙은 아베의
하-얀 상투에는 몇 나절의 때묻은 회상이 맺어 있는가. 우거진 송림 속으로
곱-게 보이는 고향이여! 병든 학(鶴)이었다. 너는 날마다 야위어가는……
(... ...)
어두워지는 황혼 속에서,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보이지 않는 황혼 속에서,
나는 힘없는 분노와 절망을 묻어버린다.
(오장환, ‘황혼’ 부분)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이육사, ‘황혼’ 첫 연)
암, 다른 시대니까 그렇지.
한참 후 (아 이 시인의 시대조차 공유하지 못할 이들이 많구나) 나온 시도
회고 귀향의 정서는 빠질 수 없지만
편안~하잖니?
차마 빗장도 지르지 못한
대문간을 지켜 불그레
꽃을 피운 능소화
종꽃부리의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매미 울음
마당 가 좁은 텃밭을 일궈
김장 채소 씨앗을 묻을
채비를 서두르는 아들은
나이보다 많이 늙었다
얘야, 시장할 텐데
연장이나 챙기고 밥이나 같이
먹자꾸나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는
더 많이 늙었다
허리 숙인 담장
키 낮은 담장 너머
휘휘휘휘 키가 큰
어둠이 기웃대는 여름이라도
늦여름의 땅거미
꽈리나무 꽈리 주머니
주먹 쥔 꽈리알 속으로
스며들어가서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황토빛 노을.
(나태주, ‘늦여름의 땅거미’ 전문)
3
빈센트는 해질녘 서쪽을 향하여 마차를 타고 가다가 “노랑!” 그랬고
그의 삼촌은 “빨강을 두고서... 쩝”하며 영 언짢아했더랬지.
앞서 나태주의 시에 능소화, 꽈리, 황토빛이 나오지?
(아주 어둡기 전에 말이지)
아프리카의 황혼을 두고 무슨 빛이라고 그러면 좋겠니?
저 Cape Town의 Table Mountain도 수국처럼 자꾸 달라지더라.
문둥이를 격리시키다가 넬슨 만델라 등을 가두어 두던 섬에서 보면
목월은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나그네’)이라 그랬고
영랑은 “저녁 해 고요히 지는 제/ 머언 산 허리에 슬리는 보랏빛”이라 했다.
해지기 전 한동안 그리고 해떨어지고도 잠깐은 시시각각으로 바뀌니까
어떻다 할 게 아니네.
4
아침 해 돋을 때 곱듯이
저녁 해 더욱 곱고 장려(壯麗)한데
아 저렇게 좋거늘
석양을 두고 슬퍼하고
황혼에 한숨짓다니!
날 때 기뻐했듯이
갈 때 뿌듯할 수 없을까?
가게 된 대로 가니까 담담하고
(가게 될 데로 가니까 설레기도 하고)
드디어 마쳤으니까 당당하고.
5
“원숭이~ 빨개”로 시작해서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 삼천리”로 이어지는
연상 작용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황혼, 황혼이혼, 황혼열차, Twilight Zone, Sunset Boulevard, 가스등, 타라 농장의 저녁놀...
시원한 게 없다.
그리고 외로운 건 외로운 거지.
아픈 건 아픈 거지.
두려운 건 두려운 거지.
{배우자라면 좋겠지만
한날 가는 것도 아니고
서로 의지할 형편 안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있기야 하겠냐만) 아니라도
반말 같은 경어로 애매한 애모(愛慕)를 표현하고
경어 같은 반말로 편안케 해주는 사이라면
아냐 그 정도 아니라도
그냥 사람이 곁에 있다면
같이 꼭 손잡을 수 있으면
그 정도면 됐네 뭐.
{없어도 할 수 없고.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나 부르자.}
윤기 흐르던 머리 이제 자취 없으나
황혼
난 괜찮은 것 같네만.
가을엔 쑥부쟁이 핀다.
앞질러 피는 것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