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보내는 편지


꼬박 샌 건 아니고

저녁 술 놓자마자 곯아떨어졌다가

(전날은 정말 한잠도 못 잤네만)

두어 시간쯤 눈 붙인 셈인데

그러고 깨어서는 말똥말똥해지더라.

시효 지난 편지들 소각한 셈 치고 안 열기로

그러니 편지 받아볼 사람 있으면 좋겠네.


제가 언제 퍼준 적 있다고

퍼주기는 안 된다고 열 내는 사람들과 입씨름할 것 있나

그냥 강물로만 흐르다가

교각(橋脚)에 부딪히는 부목(浮木)처럼 쿵 소리 내는

생각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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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은 거기서 그냥 있기로 했고

오장환 바보 올라가서 그래 잘도 살았겠다

구상은 내려왔고

웃기지도 않는 금성화랑무공훈장인가를 받기도 했고

이적행위로 옥살이도 하고

뭐 그런 것과 상관 않을 분일 텐데

참 모를 일이야.


만나지도 않은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럴 수 있거든.

해서 구상 시인을 추억했지

내 생전 가르침을 받기는커녕 뵌 적도 없지만.


{숫자로는 압도적 우세일 텐데도

개신교 예술가들은 명백하고 야단스런 선전물을 제작해서일까

도무지 그윽함이 없어

‘사랑받는 그분’ 수준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실~데없는 소리...)}


가친보다 몇 해 나중에 세상에 오셨고

같은 대학에서 수학하셨는데

그분은 ‘임종 예습’을 많이 하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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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이랄 것은 없어도

많은 시가 넉넉한 참회와 기도 같은 기도이었다.

굳이 ‘임종 고백’ 아니더라도.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 왔다


    더구나 평생 시를 쓴답시고

    綺語(기어)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임종고백’ 전문)


    '아버지, 저의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시늉만 했지 옳게 섬기지는 못한

    그분의 최후 말씀을 부지중 외우면서

    나는 모든 상념에서 벗어난다.


    또 숨이 차온다.


     (‘임종예습’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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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쯤 되어 회개하면...”이라는 사람들 많지만

살 날이란 오늘 하루만인 줄 알기나 하는지...


    오늘도 神秘의 샘인 하루를

    구정물로 살았다.


     (‘하루’ 부분)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 ...)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부문)


    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

    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 그지없다.


    하기사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며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저 풀꽃과 마주한다는 사실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묘하기 그지없다.


     (‘풀꽃과 더불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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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석무(夕霧)’라고 부르는 품종

 

 

구상 그는 반골로 태어났다.

체제와 허위에 대한 반골이라면

생명과 진리에 대해서는 무한긍정이리라.


{‘운동권’이라는 말...

참여하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외경(畏敬)과 미안함으로 다가왔다가

출세보장의 경력증명이 되었고

극복해야할 허위의식을 확대재생산하는

“개혁!”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내는 생소리를 의미하다가

충정을 알아주지 못하는 이들에게 “배 째(고 들여다 봐)!”라는 하소연으로 들리고...

말을 말아야지, 에이 그만하자.}


박완서가 그랬던가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이라고.

(그야 사람 두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옳으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옳음도 잃어버리고 말더라.

아름답지만 옳지 않은 것? 

무명(無明)의 백태가 낀 눈으로 보면

아름다운 건 다 옳더라고.

(사람의 마음을 빼앗으니까)


옳기에 큰소리치는 사람 아니고

거리낌 없어도 겸손한 사람

아름다움을 고른다고 옳음을 놓치지 않아도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

그런 사람들 더러 있어

사귀면 좋겠네.


이렇게 앉아있다 보니

옆방에서 새벽 찬송이라고 라디오 볼륨 올릴 시간 되었다.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기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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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는 직장이 있는데 이래도 되는 건지

오늘은 병가(病暇)라 치고...


이제 구상 님 말고

길게 말 나눌 분 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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