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사랑이 중한들
장준하의 죽음에 대해서라면 실족사냐 타살(정적 암살)이냐를 두고
무슨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 같은 데에서 밥값하려고 보고서를 내기도 하겠으나
고정희의 죽음이 단순 실족인지 의도적인 결행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 가치를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뭐 “자취방 책상 위에 남긴 시로 미루어 보건대...” 정도로 끝날 수밖에.
고인은 늙기를 멈추었으니까
(유관순 누나?)
살아남아 늙은 사람들이 나중에 되새기며 “쯧쯧, 젊은 사람이...”로 되지만
그녀가 살아있더라도 내게는 손아래니까
누이로 알고 말 놓겠네.
네가 절망하던 때에
너뿐 아니고 모든 이들이 암울한 시대병 풍토병에 걸려있을 때에
난 밖에 있었구나. (면목 없다.)
그래도 미안한 얘기다마는
열사(烈士)의 분사(憤死) 같은 것, “나 하나 죽어...”
그런 건 아니었을 거라.
네가 더 유명해지기 전에도 네 시 몇 수 알았더랬다.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 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 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 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 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 살 찢는 아픔이어라
(‘그대 생각’ 전문)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하늘에 쓰네‘ 부분)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첫 련)
아침에 오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저녁에는 십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꿈길에서 십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꿈깨고 오십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무심함쯤으로 하늘을 건너가자
바람처럼 부드럽게 그대를 지나가자
풀꽃으로 도장찍고
한달음에 일주일쯤 달려가지만
내가 내 마음 들여다보는 사이
나는 다시 석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또 다른 ‘그대 생각’ 전문)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유유히 내 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년의 푸른 풀밭 강둑에 나와
물이 흐르는 쪽으로
오매불망 그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한 쪽 뚝 떼어
가거라, 가거라 실어 보내니
그 위에 홀연히 햇빛 부서지는 모습
그 위에 남서풍이 입맞춤하는 모습
바라보는 일로도 해 저물었습니다
불현듯 강 건너 빈집에 불이 켜지고
사립에 그대 영혼 같은 노을이 걸리니
바위틈에 매어 놓은 목란배 한 척
황혼을 따라
그대 사는 쪽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강가에서’ 전문)
(그만해도 되겠지...)
많이 아팠었구나.
한번도 아니었던가 보다.
그래도 죽을 만큼?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그러더라 마는.
그대가 사랑한다 해도
죽도록 사랑한다 해도
그리워한다 해도
못 잊는다 해도
그리고 그가 그대 사랑을 대단찮게 여긴다고 해도
싫어한다고 해도
사랑하는 줄 알지만 어떻게 해줄 수 없다고 해도
사랑을 사랑으로 갚을 형편이 안 된다고 해도
(그렇다고 그가 ‘나쁜 X’인 건 아니니까.)
작자 미상의 시조 한수가 전해지긴 한다만...
사람이 사람 그려 사람 하나 죽게 되니
사람이 사람이면 설마 사람 죽게 하랴
사람아 사람을 살려라 사람이 살게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거라면
그대가 그대를 살릴 수 있었네.
아무리 사랑이 중한들
사랑 말고 할 게 많고
삶은 사랑보다 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