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날
{제가 무슨 루팡이나 홈즈도 아니면서
우산을 지팡이처럼 휘두르고 다니는 애들이 있어서
(아 도무지 ‘곁’을 의식하지 않는 이들 무서워)
장마철에 나다니기가 좀 그렇다만
전혀 안 나갈 수는 없으니까...}
문화의 거리에도 자연은 있어서
(하긴 자연을 끌어들이지 않고 문화를 엮을 수 있겠냐만)
감나무, 벚나무, 모과나무 가지 사이로 비 뿌리기를 잠깐 잊어버린 하늘 쳐다보기도 하고
능소화 시체들 “밟아 말아?” 궁리하다가 건너뛰고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훌쩍거린다.
여름 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 내린다.
(나희덕, ‘기억의 자리’ 부분)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나희덕, ‘찬비 내리고-편지 1’ 부분)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 ...)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나희덕, ‘젖지 않는 마음-편지 3’ 부분)
제 설움에 겨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서
정지용의 ‘비’로 판을 갈아 끼우고
“너 참 美하다” 그랬다.
{무슨 대감 집이었다는 데 앞에서
“여긴 비싸잖아?”
“묵고 나서 돈 내는 거니까 함 드가 보고...”로 머뭇거리다가
자리 잡고 나니까 여유가 생겼던 모양이다.}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ㅅ낱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돌담길 끼고 커피 잘 뽑는다는 집 있다 해서 찾아 나섰다가
(나도 ‘barista’ 과정 다니고 있네만)
“못 찾겠다 따까리”로 주저앉았다.
(내가 이렇게 오래 걸어 다닐 형편이 아니거든)
40여 년 전 오죽(烏竹) 한 줌 자라던 곳에 아직도 커지지 않은 대나무 있음을
(무슨 도서관인가가 됐어)
보고 그냥 돌아서는데
지하철까지 걸어갈 길이 까마득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