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밤
뭘 그런 걸 물어, 그 ‘너’가 누구였냐고 그러면
좋아하는 술 많이 마신 다음이라도 그냥 피식 웃을 걸.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정채봉,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원한처럼, 그런 원한 해결하겠다고 품고 다니는 비수처럼
두고두고 생각하는 ‘너’가 있지.
(더러 바뀌기도 한다더라마는)
적시자고 오는 비
맞고 젖어도 괜찮겠지만
“몸도 성치 않은 노인네가...” 라는 시선 못 이겨
도롱이 걸치고 산보 나갔는데
이렇게 아프게 맞을 줄은 몰랐다.
굉장하구나.
옛적에는 그런 시들이 교과서에 실렸다.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주요한, ‘비소리’ 첫 련)
이건 그런 비 아니네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오는 비 아니네.
너무 하다 싶네.
이토록 험하고 심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지?
비 온다
와야지
와도 많이 온다
많이 와야 하지
한꺼번에 퍼부어야 할 건 아니지만.
빗방울쯤 되었으면 꼭 파초(芭蕉) 잎을 찢어야 하는가?
빛을 두고 어찌 보면 입자이고 어찌 보면 파장이라 하더라마는
이건 물줄기네 아니 물폭탄이네.
{그렇다고 욕할 수도 없고...
“님이 오시나보다” 하듯 “비가 오신다”고 그러던데
비님에게 막말할 순 없잖아.}
비 오는 밤이면 생각난다고 그러대
어디 두었는지도 몰랐던 기억들이 손닿는 데로 옮겨온다고 하더군.
나중에 후회할 편지 한번 써보고 싶어진다더라.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 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 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윤동주, ‘편지’-
이런 비라면
이렇게 시끄러운 비라면
다른 때보다 더한 그리움을 유발하지 않겠네.
소나기의 추억이랄까
갑자기 불어난 시내가 건널 수 없는 대협곡이 되어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을 목 놓아 부르다가
비 잦아들고 물 빠지면 없었던 일로 치게 되는
그런 시시한 이별들만
버섯처럼 돋는다.
딱 아무개라 할 수 없는 그런 막연함
조금 전까지는 몰랐다고
지금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패랭이꽃 한 줌에다 나리꽃 두 대쯤 끼워 들고
찾아가고 싶다.
수도자니까 그러시겠지
그래도 이건 너무 심심하다 (매가리...)
누구에게나 모두를 위해?
수많은 나의 너와
젖은 손 악수하며
이 세상 큰 거리를
한없이 쏘다니리
우산을 펴 주고 싶어
누구에게나
우산이 되리
모두를 위해
(이해인, ‘우산이 되어’ 부분)
{봄비 가을비 눈보다 못한 겨울비 다 있는데
여름에 많이 자주 내리니까
따로 여름비라 할 것 없는가보다.}
그대에게 비이고 싶어.
여름비이고 싶어.
필요한 이에게 바치나
때리듯 베푸는.
무심한 듯 많이 아주 많이만 쏟아내는.
그래도 이런저런 관심은 없지 않아서
빨빨거리며 잘 돌아다니는 녀석 어디 있을지 빗길에 괜찮은지
그 동넨 경보까지 내린 지역인데...
물어보고 나서 더 할 말 없겠어서
전화기 만지작거리다가 그만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