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에 읽을 연애시


병원 나오다가

걷기 힘들어

젖은 정원석에 주저앉았다.

멀쩡하지 않은 사람 쳐다보는 시선들 더러 꽂혔다.

낮추니까 기는 것들이 보인다.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일이

    어쩌면 서로를 얽매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눈시울 젖은 연분홍 너를 보고서야 알았다

    애써 너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넝쿨손을 뻗어 네 몸을 감고 있다

    이 세상 한 몸을 던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낡은 지붕에 깔리는 노을처럼 얼마나 가슴이 저리는 일이리


     (나종영, ‘메꽃을 위하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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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싹 마른 자리를 견디고 있다


     (김기택, ‘얼룩’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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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저 껍질은 무엇?  매미 허물이구나.

몇 년을 땅속에서 굼벵이로 살다가

몇 날 볕 쬐겠다고 날개 붙여 나온 때가 햇빛 쨍하는 오후 아니라서...

내일이라도 비 그치거든 원 없이 부를 이름.


    저렇게, 계단에도 창문에도 전봇대에도 붙어서 우는 매미처럼

    저렇게 지겹게 저렇게 표독하게 저렇게 애절하게 생을 다하여 부르는

    이름이 한 번 되어볼래?  생이 질 때까지 놓지 않는 독한 향기가 되어볼래?

    애타는 목소리로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우리 사랑이라는 걸 한 번,


     (강미정, ‘여러 겹으로 된 한 통의 연애편지’ 첫 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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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난상황에 “나 아파요”라는 소리나 해대는 게 부끄럽다고 변명하려는 건지

반동 준비!  요설 시작!  한나 뚤 서이 너이~}


“나라 전체가 온통 미사일 위기다 물난리다 소란스러운 때에

나 혼자만의 아픔에 함몰되지 않도록 주여 힘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다가 아픔을 참지 못하시고

그 아픔만큼 신음을 높이다가 병원에 다시 입원하셨다.

나라는 나라고 ‘내’ 아픔은 가까이, 아니 몸속에 있는 거니까.


큰비 오는 줄 알면서도 방재 대책이 이 모양이냐고 그러면

“이렇게 몰아서 퍼붓는 건 어쩌다가 인데 그 ‘어쩌다가’에 맞추어 시설 투자를 한다는 것은...”으로

대꾸한단 말이지, 자연재해는 하늘이 내는 것이니 나라님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해마다 쳐들어와서 약탈해가고 인명을 앗아가는 데에서도 사람 살고

사는 사람은 떠나지 않는다.


김정환 시인이 약관 지났을까 쯤 되어 등단 시로 들고 나왔던 것인데

(좀 길지만...)


    해마다 장마 때면 이곳은 홍수에 잠기고

    지나간 물살에 깎인 산허리 드러낸 몸을 보면서

    억새는 자란다 그 홍수 치른 여름 강가 태우는 땡볕

    억새는 자란다 떠내려가는 흙탕물은 한없어

    영영 성난 바다만 같아 보이고

    움켜도 움켜도 움켜잡히지 않는 발아래 한줌의 흙

    뿌리는 이대로 영영 이별만 같아 보이고

    죽음같이 빨려 들어가고만 싶은 진흙창 속으로

    그러나 억새는 자란다 기어들 듯 말 듯

    모기 같은 속삭임으로 땅에게 마지막 이별에게

    가지 마셔요 저는 당신의 애기를 가졌어요 당신처럼 설움뿐이지만

    당신처럼 활활 타오르는, 당신처럼 언제나 떠나가고 싶어 하지만

    당신처럼 제 뇌리에서 지워드릴 수 없는

    질긴 생명의 씨앗이 제 안에서 꿈틀대고 있어요

    모두 당신 거예요 이 흠뻑 젖은 제 육신의 꿈과 숙명

    그리고 당신의 모질지 못했던 과거 이제 돌이킬 수는 없어요


    억새는 자란다 그 여름 홍수 지난 온 몸이 뜨거운 검은 땡볕 의연히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알지 못할 고통이 주는 삶의 참뜻을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이젠 헤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의

    다시는 헤어질 수 없음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만나서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다시는 떠나갈 수 없음이

    다시 한번 떠나가고 있는 줄...?


    가난하고 피난 내려온 사람들의 판자집만 들어선

    하필이면 이 마포, 강변동네에서.


     -‘마포, 강변 동네에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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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질이 떨어져서 그렇지 전쟁통에도 밥은 먹으니까

밥 먹고 사는 동안 연애는 그치지 않을 테니까

수재민들 앞에서 연애시를? 할 것 없다.


‘강 같은 평화’라고 그러지만

강이라서 평화로운가

여느 때야 다 그렇지

화나지 않았을 때는 뭔들 사납겠니?


넘치지 말라고 흐르는데

흘러서 넘쳤다니?


<Winterreise> 6곡, ‘Wasserflut’

그냥 ‘홍수(洪水)’라고 그러면 되지 ‘넘쳐흐르는 눈물’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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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도 가볍지 않고

눈물이 힘들어 뵈지 않다가

깊어지면

소리 내지 않고 흐르면서

자, 자 그러더라.

강은 그렇게 달래주던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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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흘러가는 강물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그 속에 또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습니다.


    강물을 들여다보는 나를 들여다보는 당신.

    나를 흘러가게 하며 또 무엇인가 내 속에 흘러가게 하는,

    흐르는 구름 속에 햇빛이 축포처럼 터지고,

    허나 소리들이 모두 눈감고 숨죽이는 그런 마음을

    다시 내 속에 띄우는 당신.


     -황동규, ‘소곡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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