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약함이기를 바라며
건배! 구구팔팔!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면서 뭐하게?
할 ‘무엇’은 따로 없지만 그냥 자원 감소와 대기오염에만 일조하겠단 말인지...
할 일 있고 아프지 않으면
잘 먹고 오래 사는 게 좋지.
잘도 발려 드셨네, 남은 가시도 작품일까
아들 Claude, Paloma와 저런 때도 가졌구나
화중 두 인물 사이에 모종의 사연 없음
그들의 창조력의 원천이 ‘color慾’은 아니었겠지만, 그들은 순간마다 즐거운 삶을 누렸다.
성취를 위하여 기쁨을 연기하지 않았다.
최대의 성취는 즐김이다.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지 않기. 아, 난 너무 오래 끌려왔어...)
가친은 피카소(1881~1973)의 선분 길이와 거의 같은
(그렇지만 다른 쪽은 아직 열린 반직선, and still going on...) 세월을 사셨다.
어머님께서 떠나신지 20년이 되었으니 홀로 사는 게 뭐 좋겠냐만,
이삼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대로 괜찮은 건강과 대접을 즐기며 사셨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내용이야 뭐 평범하지만- 등의 책을 길게 인용하며 말씀하셨고,
구상 시인의 ‘노경’ 같은 시를 필사하거나 자작시도 몇 편 남기시고 그랬다.
그러니 최근 두어 해 동안 더러 영적으로 최상 상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조차 오히려 당연한지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가친과 같은 해에 태어났으나 참 일찍 가셨다.
성인급에 이르신 분께 ‘성숙하다’고 그러면 버릇없다 하겠지만 일찍 철든 분이셨으니까.
많은 글과 사진(“그것도...”)을 남겼는데, 아래에 잘 알려진 기도문 하나 싣는다.
주 하나님, 제가 어디로 가는지 통 모르겠습니다.
제 앞에 놓인 길을 보지 못하고, 그게 어디서 끝이 날는지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알겠습니까, 뿐더러 제가 당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 제가 실제로 그렇게 행함을 의미하지는 않지요.
하오나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욕구가 정말로 당신을 기쁘시게 함을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행하는 모든 일 안에 그 욕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욕구와 떠난 어떤 일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제가 그리 한다면 주님께서 저를 바른 길-비록 제가 그것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더라도-
로 인도하여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제가 버려졌거나 사망의 그늘에 처해진 것 같을지라도
저는 당신을 늘 의지하겠습니다.
당신은 늘 저와 함께 하시기에 저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주님은 제가 위험을 홀로 직면하도록 결코 저를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와도 가까운 사이였고
그리고... 헨리 나우엔(Henri Nouwen, 1932~1996) 신부.
토론토에 살 때에 그분을 뵌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냥 마음 좋은 아저씨 정도로 알았다.
(눈X이 뼜지 뭐야...)
개신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카톨릭 집필가 중 한분이다.
나는 바랍니다
내가 모든 이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나는 바랍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볼 때 내가 더욱 작아질 수 있기를,
그러나 나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삶의 기쁨이 작아지는 일이 없기를.
나는 바랍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지 않기를.
나는 바랍니다
다른 이가 내게 주는 사랑이 내가 그에게 주는 사랑의 척도가 되지 않기를.
나는 바랍니다
내가 언제나 남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살기를,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내 용서를 구할 만한 일이 없기를.
나는 바랍니다
언제나 나의 한계를 인식하며 살기를,
그러나 내 스스로 그런 한계를 만들지 않기를.
나는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소망을 품고 살기를.
약한 분이신데 아직도 어렵기만 한 어른과 아주 어렵게 여겨지지 않는 대화의 시간을
실로 오래간만에 가졌다.
What we feel is not who we are.
(무슨 얘기냐 하면...)
정서적으로 ‘up and down’이 인격이나 영적 자아의 고양이나 침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한번 ‘아들’이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아들 됨’을 잃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한번 얻으면 상실되지 않는다는.
우울증? 그런 것이 있다 치고, 그의 내부는 손상되지 않았다는.
시원찮은 쪽만 보며 한숨 쉴 게 아니고...
‘약함’은 흉거리가 아니라 사랑의 조건이라는.
그렇지만 신화적이고 교리적인 내세와 영생에 관한 설교/강론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니까
이제 작동하지 않거나 효과적이 아닌 ‘죽음의 연습’이나 ‘죽음의 준비’는 버리고
새 contents와 새 software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무작정 현대의 불신앙과 무종교를 개탄할 것이 아니다.
(Post-Christian era는 그냥 온 게 아니지.)
신자라면서 저들도 믿지 않고 믿어도 역사하는(working) 능력이 없는 것들을
예의와 향수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형편이면서
교인 감소를 우려하다니...
예전에는 “Spare dime?” 그랬는데 이제는 지전으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