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일기 11 여름 꽃을 치우지 못하고


여름 내내 제 자리를 지킨 꽃들에게 이제 그만 가보라고 그랬다.

서리 내린 아침 시커멓게 죽어있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이겠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하는 거였나?  서운하다고 그럴까?

밤새 기화(氣化)되어 싹 사라지면 모르겠거니와,

아니면 뽑아 던져야 하는데...

아직 꽃을 달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 버린단 말이냐?

(‘님’의 지위에서 격하된 이성 친구와의 어정쩡한 미안함이 그럴 거라?)

 

 

         6100101.jpg      6100102.jpg

 

         6100104.jpg      6100103.jpg

 

 

가을꽃들도 있는데...

저들도 한때인 건 마찬가지인데,

백로(白露)나 지날까 상강(霜降) 가면 견디지 못할 텐데...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데!

 

 

6100107.jpg

 


여린 마음을 접지 않고서는 정원사도 할 수 없을 터.


꽃에게는 의지가 없으니까

정리하는 것은 사람 몫이다.

 

 

6100105.jpg

 

                                    폐품 활용이 아니고...

                                    텍사스에서는 한여름 더위를 견디지 못했던 장미들이 이제 다시 핀다.

                                    눈에 띄는 자리가 아니라서 피어도 그런가보다 하는,

                                    그러나 향내만은 끝내주는 ancient rose를

                                    내가 앉던 자리에 갖다 두었다고 아내가 증명사진을 보내왔다.

 

 

유효기간이 지난 것들 내다버리기

포켓수첩의 주소록에 오를 이름들의 우선순위

구습과 악행, 원한...


차선은 최선에게 여간해서는 자리를 내주려들지 않을 것이다.


아, 아름다운 것도 언제나 아름다운 건 아닌데...


나중에 다시 올 것이라면

그때 또 아름다움이 회복될 줄 알면

재회와 화해를 믿는다면


(말할 것도 없지만 그냥 보내기는 안됐으니까)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노라.

 

 

                                6100106.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