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면 어떻고 생이라면 어때서


연휴에 갈 데 없다고 한숨쉬고 있을 건 아니고

서늘한 바람 쐬지 못하지만 가을햇볕 같은 시라도 읽자고

퍼질고 앉아 널어놓은 고추들을 가위로 가르듯 시집을 뒤적인다.


이기철 시인이 그랬다. 


    후일에라도 나는 나를 인생파 시인이라고 불러주기를 염원한다.

      (‘시작 노트’)


훗~ 누구는 야수파?  파는 무슨 파?

 

그는 여린 것들, 작은 것들, 자연-웅장하지 않은-에 눈을 돌리고 마음을 쏟는다.


    굴뚝새들은 조그맣게 산다

    강아지풀 속이나 탱자나무 숲 속에 살면서도 그들은 즐겁고

    물여뀌 잎새 위에서도 그들은 깃을 묻고 잠들 줄 안다

 

      (‘작은 것을 위하여’)


    눈썹새 안개꽃 쓰르라미 울음을 버리지 않고 나는 시에 담고 싶다

      (‘푸른 날들을 위하여’)


그러나, 어디 사람 같은 자연이 있으랴?  사람만한 아름다움이 있으랴?


    나는 풀과 나무만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 생각하는 마음이 내 안에 들어와 등불이 된다.

      (「가장 따뜻한 책」 ‘自序’ 중에서)


    부르면 부를수록 사람의 이름은

    갓 따온 과일처럼 신선하다

      (‘마음은 때로 백조가 되어’)


해서, 그 촌스런 ‘인생파’는 “전 ‘자연파’가 아녀요.”라는 뜻인가 보다.

그의 ‘靑山行’은 사람을 두고 떠나는 길은 아니었구나.


    어느 날 내 눈물 따뜻해지는 날 오면

    나는 내 일생 써온 말씨로 편지를 쓰고

    이름 부르면 어디든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릴 사람

    만나러 가리라


    써도써도 미진한 시처럼

    가도가도 닿지 못한 햇볕 같은 그리움

    풀잎만이 꿈의 빛깔임을 깨닫는 저녁

    산그늘에 고요히 마음 베인다


     (‘산그늘에 마음 베인다’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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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촌에서 바라본 경안천(옛적에는 모랭이라고 그랬다.)


   

    나무 같은 사람 만나면 나도 나무가 되어

    그의 곁에 서고 싶다

    그가 푸른 이파리로 흔들리면 나도 그의 이파리에 잠시 맺는

    이슬이 되고 싶다


    그 둥치 땅 위에 세워 두고

    그 잎새 하늘에 피워 놓고도

    제 모습 땅속에 감추고 있는 뿌리 같은 사람 만나면

    그의 안 보이는 마음속에

    놀 같은 방 한 칸 지어

    그와 하룻밤 자고 싶다


     (‘나무 같은 사람’ 부분)



그 ‘인생파’라는 말처럼 어벙벙 어리버리로 만들어버리는 말이 또 있다.

그의 사전에, 아니 시집에.


    아,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삶보다는 훨씬 푸르고 생생한 생


      (‘나는 생이란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삶’보다는 ‘생’이 생생해서 좋다?


생이 늘 생생하지는 않을 것이고

쌩쌩 지나가서 좋을 것도 아니고...


그 생은 아니지만, 다른 뜻도 있어서


(1) 아직 익지 않아서 생쌀, 생감, 생김치

(2) 가공되지 않았다든지 되어진 상태대로 남아있다는 뜻의 생가죽, 생고기

(3) 무리, 애매, 공연함을 나타낼 때 생떼, 생사람, 생야단

(4) 지독, 혹독, 에고... 생지옥

(5) 아직 마르지 않았으면 생가지, 생장작

(6) 살아서 당하면 생과부, 생불행

몇 개 정도 더 주워 담을 수 있겠지만 이 정도로...


좀 마르면 어떤가?

생으로 먹어도 비린내가 안 날 정도라면 아주 괜찮고

물간 것이라서 버려야 하는가?

생굴도 좋지만 (조금 썩은) 홍어회도 먹겠더라.

(푹 삶았다고 삶이 된 건 아닐 것이다.)


‘생철학(Lebensphilosophie)’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이제 와서 ‘생’트집일세?

(하긴 뭐 ‘검사스런’ 정도가 아니라 ‘O현스런’ 생소리가 시대분위기 아닌가?)


삶은 살림이라 구차하고

생은 공적으로 기억되어 괜찮게 들리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一日一生, 日日一生이니

한 땀이 귀한데

잡소리 그만하자.


사람을 좋아하는 좋은 사람이라면 이런 소리 안할 것이다.

(아, 나는 전화 오래하는 재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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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꽃을 영어로 ‘four o'clock’이라고도 부른다.

                                                  해가 기울기 시작한, 오후 4시나 되어야 핀다고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