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내일이면 개학인데 방학 숙제 건드리지도 않았던 아이처럼
긴 연휴 끝에 ‘일’로 돌아가야 하는데
왜 이리 불안할까
불안하다고 자각하지 않는데 통 잠을 이룰 수 없네.
한숨도 눈 붙이지 못했는데
박명(薄明)이 잦아들자 부끄러워
엎드린다.
(그냥 ‘어슴푸레’라고 하면 될 걸 ‘薄命’을 탄식해서였을까?)
마른 손 꼬부리고 푸석거리는
껍질만 남은 옥수수 밭을 지났습니다.
결 고운 자주실 술을 달았던
통통한 옥수수자루들은 일찌감치
탈곡기의 이빨을 거쳐 황금 낟알로
지붕 밑 안전한 곳간에 들여져
든든히 겨울을 날 것입니다.
(… …)
달이 차기 전 대지에 떨어져
서리 맞고 물크러진 덜 된 열매가
칙칙한 거름 되어 은밀히 스며들어
오는 가을의 열매를 한층 붉게 하는 것입니다.
(덜떨어진 게 먼저 떨어졌더라도
‘실패’라고 그러지 않으시겠지요.)
석양이 몇 뼘쯤 남아 있는 가을 들판
님 앞에 앉아 있는 이 시간의 아룀은
남은 날을 속속들이 곰삭게 하소서.
발끝까지 자양으로 죽게 하소서.
기꺼이 거름 되어 앞서 걸어간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아도 행복하였던
겸손했던 뭇 걸음을 뒤따르게 하소서.
갓 쪼갠 삼나무 널판의 날내가 좋아
나사렛 목수간을 찾아간다.
고운 손 부끄러워
거들러 왔다 할 수 없으나
당신의 재빠른 손놀림을 지켜보며
작업대 밑의 톱밥이라도 쓸어 담게 해주셔요.
거치적거리기나 한다면
쉬실 때 땀이라도 닦아드리겠어요.
이것도 저것도 ‘베로니카’라고 부른다.
수건 한 장 건네고 성녀가 된...
그리고...
어찌 일만 하고 살겠어요,
할 만큼 하시고 우리 벌판으로 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