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일기 15 간이역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아주 멋진 말인 모양일세, 오세영은 8월을 두고, 또 ‘9월’에서도 그랬다.
이르고 싶은 말,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겠으나
수유(須臾) 간에 스치며
희미한 웃음과 미약한 한숨 확인하면 됐다.
일탈(逸脫)을 벼르며 잔뜩 기다린 가을은 그냥 가버릴 것이다.
언젠 뭐... (해마다 그랬다는 말.)
내리려고 그랬는데 지나쳤다는 듯이
“응, 왜 서지를 않지?” 그러며 잠시 낭패한 시늉 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니
표정 관리할 필요도 없다.
거기서 내릴 거였다면 완행열차를 탔어야지.
생각은 뭘 못해보겠나 하지 않을 짓도 꿈이야 꿀 수 있지.
지나치고 나면 아아, 그 도정에 작은
간이역 하나가 있었던가
간이역 하나가
꽃과 같이 있었던가.
(정공채, ‘간이역’ 부분)
또, 젊은 여자니까 “한 때나마”라는 말을 쓸 수 있었을 것인데,
한때나마 나도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기차가 지나가듯이 벌판이 흔들리고
잘 익은 들녘이 타오른다
지는 해가 따가운 듯 부풀어 오르는 뭉게구름
기차를 기다린다
지나간 일조차 쓰리고 아플 때에는
길 위가 편안하리라
-김수영, ‘간이역’-
10원짜리 동전은 봉지를 따로 구입할 때만 생기는 잔돈이다.
일부러 들고 다닐 것도 아니고 교환가치도 없다.
쓸모없는, 그래도 없애지 못하는, 받으면 챙겨 넣는 우수,
그런 간이역에 내리고 싶다.
폭설대피소에 갇히듯
다시 서는 열차 없이 며칠 가버리면 좋겠다.
추월선으로 예까지 온 건 아닌데
숨 가쁘게 살아온 적 없는데
염치없지만 또 쉬고 싶다.
피카소가 이런 그림을 그린 적도 있구나... ‘Sleeping Peasant’(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