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일기 16 산에 가고 싶다
벌 받는 아이처럼 억울하고 무섭고 아픈 배경색에도
예쁜 꽃무늬들이 무수히 들어찼던 이상한 기억...
작년에 딱 한번 고국의 가을하늘을 감나무를 바다를 억새를 보고
(32년만이었네)
자주 다닐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가을 산행 아직 한번도 없었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다섯 주를 가로질러 Smokey Mts.을 찾아갔는데
{록키는 “우와 굉장하다” 그러며 바라보기만 하는 산이지만
스모키 산은 들어갈 수 있거든, 아주 깊은 데까지.
왜 거기만 가냐는 아내에게 “한국 산들 같거든.”이라는 핑계가 있었다.}
아, 이 작은 나라에서 지리산은 내게 무릉도원일세,
좋다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는, 아니 정말 있기는 있는 건지.
잡힐 듯이 보이는 북한산도 못 가면서.
산에 가면 산이 없다
거리를 두고 볼 때가 산이지
산에 가면 산이 없다.
나무와 풀과 바위, 구름과 물, 꽃과 새가 있지만
산은 없다.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
너를 지운다는 것,
밤새 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
초롱꽃처럼
이슬이 이슬을 지우면
안개가 되고,
안개가 안개를 지우면
푸른 하늘이 되듯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오세영, ‘나를 지우고’-
산 떠나면 산이 없다
내가 지워지면 산도 없어지는가?
산 속에서는 다 산이라
산인지도 모르지만
그게 산인 게지.
떨어져서 산을 보게 되면
나는 살아나고
산은 사라지는데
저 산은 산 아니라면서도
한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