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일기 17 자유석?
“자유석이 뭔데요?”
쫑알쫑알 지지배배~~~
들어도 석연치 않고 바쁜데 왜 귀찮게 구냐는 표정이어서
결정적인 질문 하나로 끝내기로 했다.
“그러니까 앉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운이 좋으면 앉아가기도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어요.”
그냥 사기로 했다.
(‘운’에 기댄 적이 별로 없기에 어쩌다가 걸어보는 사람에게는 고객확보의 차원에서
운을 관리하는 존재가 오히려 추파를 던질 것 같기도 했고...)
아기보다 더 위험한 노인을 모시고 사니 늦게 갈 수도 없다.
“17, 18호 차량 중에서 비는 자리 아무 데라도 앉아가실 수 있습니다.”
아무 데라도! 그래서 자유?
들어가 보니 서서 가는 사람이 서른 명 정도는 되었다.
앉아가시는-특권층, 귀족, 상전 같았다- 분들에게 폐를 끼칠까 염려되어
좌석의 등받이나 팔걸이에 기댈 수도 없고...
해서 객차를 연결하는 좁은 공간에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히 들어서들
분노와 절망의 표정으로 인종(忍從)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나도 통시 앞에 서서 가면서
바로 옆에서 쌍시옷과 한숨을 복날 개 헐떡거리는 빈도로 내뱉는 존재를 감당해야 했다.
(그러다가 졸더니 아예 온몸을 내맡긴다. 어디 사는 뉘 집 아낙인지 내 원...
참을 수 없는 이물질의 무거움.)
자유석이라고 하면
지정된 자리에 앉지 않아도 되는
좋다고 생각되는 자리라면 어디라도 고를 수 있는
나는 택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 없는
무슨 특권이 연상되지만
그것은 좌석권이 없는 ‘입석’이다.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이신 어느 분이 배반 때린)
만해 어른께서 일찍이 그러지 않으셨던가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남들은 ‘자유’를 좋아한다고 그러지만
나는 ‘지정’을 좋아하여요.
아침에 일어나려니
The empire (좌골신경통이) strikes back.
자유석?
일본에서 먼저 쓴 말을 도입했는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사기 치면 안 돼지,
‘입석’이라고 그래야지.
아니면,
“서서 가는 게 보장되었지만, 기어이 그렇게라도 가시려거든...”이라고 그래야지.
{아, 철도청...
옛적에 자음을 바꿔 부르던 이미지가 생각난다.}
이런 게 자유석이야, 알간?
이렇게 글을 끝내자니 뭐땜시 시간 썼는지 더 꿀꿀해졌고
찢어발기자니 정서 순화에 저해가 되겠는지라...
기왕 나온 이름 다시 한번 불러보자
가을하늘에 대고 아아 만해(卍海)~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쏘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 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
싫은 것만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 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도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느려면
님에게만 안기리라.
-한용운, ‘정천 한해(情天恨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