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때인 만큼
{신문 보고 ‘나도 한마디’로 거든 적 없지만...
조간신문을 펴들자 눈으로 다가오는 사진.
개성공단을 방문한 김근태 열린우리당 당의장이 북측 의례원 동무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그리고,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잠시 몸담고 있는 민간 구호개발 NGO의 일로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기에
그 ‘분위기’가 뭔지 알 것 같다.
근무처의 회장을 비롯한 대북 팀 직원들은 답답할 정도로 ‘분위기’에 넘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셀 수도 없는 접촉기회 동안 실수함이 없이 전문사역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수백 명이 자리한 공식 환영만찬 같은 데에서도 “저는 술을 할 수 없는지라...”라며
가져온 포도주 잔을 물리고 물을 들어 건배하는 원칙을 지킨다.
잘 가라네. 이런 장면 처음 보면 마음이...
현 집권 측에서는 “이럴 때일수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주장하거나 바라는 바는 다르지만, 국민의 대다수도 “이럴 때일수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럴 때일수록...
매화타령, 국화타령이나.
세월이 하수상하니 옹기종기 모여 역적질 혐의 받을 짓 말고 월하독작이나.}
간밤에 국립극장에서는 ‘겨레의 노래뎐’이 있었다.
7회째인데, 이번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직접 거들어 마련한 자리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서울로얄심포니오케스트라, 국립오페라합창단,
김홍재 지휘, 장사익, 저대와 옥류금이라는 놀라운 악기, 살풀이,
마지막 순서로 소프라노 윤인숙이 굉장치도 않은 성량과 무대의상으로 흥을 돋구려 했는데...
“통일의 길”, “우리는 하나”?
흥이 없는 거다.
마음에 없는 박수 잠깐...
썰렁 개그 같았다.
왜 열광이 없을까?
때가 때인지라.
지난 6월 평양 ‘소년 궁전’에서
갈대의 노래
해오름극장에서 나와 남산의 밤기운, 살랑거리는 갈바람을 맞자
‘갈대의 순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왜? 때가 때인 만큼.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부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 계신 줄 아는가?
대자대비의 여린 손길에 세필을 잡아 구만리장공을 섬세한 천정화로 채우시는 분.
{그야... 때 되면 어린 순 자라도록 마른 가지들 거둬내고
그을음만 내는 심지를 갈고 등피를 닦으실 것이다.}
그 믿음 있으니까
하늘 보며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하늘 바라본다고 어디로 날아갈 건 아니고
꺾이고 베였어도
땅에 뿌리가 박혔으니 가면 어디로 가겠는가
거기서 그렇게 한겨울 나고
살아남았다고 다시 살아보겠다고
쏘옥 고개 내미는 것이다.
그리고...
흔들리면 어때?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그러지 마.
더 흔들려야 해.
살아 있는 동안은 흔들리며 가는 거니까
제가 “이제 그만”할 건 아니고
우리 충분히 흔들리자.
그리고, “응, 갈대?” 하고 보니
에고 저 천상병을 어쩌지?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천상병, ‘갈대’-
하는 짓마다 맘에 안 들어 속상할 때
더 심한 말은 할 수 없어 그만 그러지?
“정말 당신 왜 그러는 거야?”
젊은 백석이 ‘늙은 갈대의 독백’이니 할 때 그러고 싶었다는 얘기.
“정말 당신 왜 그래?”
바람이 마을을 오면 그때 우리는 섧게 늙음의 이야기를 편다
(… …)
이 몸의 매딥매딥
잃어진 사랑의 허물 자국
별 많은 어느 밤 강을 날여간 강다릿배의 갈대 피리
비오는 어느 아침 나룻배 나린 길손의 갈대 지팽이
모두 내 사랑이었다
어쩌자고?
때가 때인 만큼.
뭐 달리 할 말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