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이여 안녕

 


그냥 그런 날은 아니지만

아주 괜찮은 날도 아닌 오후 한 때

낙엽 쌓인 데에서 기어 나오는 땅강아지처럼

꼼지락거리다마는 이름이 있다.

달고 다니지 않지만 잊혀진 것도 아닌.


지금은 이동전화에 지인의 연락거점을 입력해두고

휴대용 단말기를 들고 다니는 세상이지만

왕년엔 포켓수첩이라는 게 있었다고 해두자.

자주 연락할 일 없으면서도 맨 앞에 적어두고 싶은 이름이 있지.

비밀일 것도 아닌데 버젓이 써넣기가 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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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백자 빛인 게 길게 넉넉히 눈 내릴 것 같고

성탄과 연말이 다가온다는 정서까지 합치면

내 마음 나도 모르게 꿈같은 구름 타고...


끝까지 갈 것도 아니고 다시 시작한다는 부담을 안을 것도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안부 한번 묻기로서니? 하다가

지우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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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동창회가 있사오니...   

손학규군도 온다고 그러는데...

오시는 줄로 알고 예약했습니다...

메시지가 몇 차례 들어오는데 그냥 씹을 수도 없고 어쩐다?


고국(?)에서 첫 해를 보내고 33년 만에 맞이하는 연말인데

그것 참 체면유지비가 만만찮은 세상이구먼.

(쓸데없이 학교는 많이 다녔는가)

머리 둘 데 없는 빈털터리 낭인에게 웬 이사라는 감투를 씌워

고액청구서를 돌리는 시시한 동창회도 있고.


엊저녁엔 동숭동 동기회에 다녀왔다.

할배 할망구 되어 품위 잡는 자리라 특별한 재미-난 ‘滋味’라고 하는 게 더 좋더라-는 없었지만

그래도 ‘라 트라비아타’를 최근에 공연한 국립오페라 팀이 와서 아리아들을 들려줬다.

(그게 어디야~)

 

와인 한 모금에 이성의 끈을 놓을 건 아니어서

벌떡 일어나 왕창 뽑고 싶은 마음 눌렀다만

아무래도 알프레도 역은 이제 안 되겠지, 혹 제르몽이라면... 

“프로벤자 네 고향으로.”

{고향?  있었던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만들고 싶은.}

그리고 그 비올레타 말이지

모든 소프라노를 칼라스와 비교하자면 어떻게 견뎌내겠나

그만하면 잘 했다. 

{“브라보!” 하면서 일어난 사람은 나뿐이었네.  머쓱 썰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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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이 시들면 절 찾아오라고?

하루나 가겠나, 그러니 “가시는 듯 다시 오소서”라는 얘기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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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io del passato 지난날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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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름다움은 방탕과 같이 왔다가

회개를 동반하지 않은 슬픔으로 끝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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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아, 쟤?” 할만한 애가 있어 다가갔는데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런다.

몽매에도 못 잊을 독한 그리움이라서가 아니고

바위 위로 뱀 지나간 흔적이나 보트 뒤에서 머뭇거리던 포말까지

한겨울 찔레 열매로 남는 사람에게는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가 이상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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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날이여 안녕”  Maria Call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