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달팽이 가는 길

 


저, 박기평이라고, 아니 ‘노동 해방’이라는 뜻의 박‘노해’라고 해야 알아듣겠네,

세월 지났다고 그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할 수 없겠고

그의 ‘전향’을 비난하는 생소리가 아직도 간간히 들린다.

그를 언급할 것도 아니었는데 얘기가 어찌 이렇게 시작됐네.


그렇게 험한 세월 보낸 게 고매한 이상과 불타는 정열로 ‘선택’한 투쟁이나 운동이어서가 아니라

‘버려진 사람들’-그의 첫 시집 제호-의 ‘개 같은’-둘째 시집의 이름 앞부분- 삶은

그냥 살아야 한다는 관성에 몸을 담고 굴러온 것이다.

노조 같은 것을 결성할 동지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정규직’이니 하는 말로 포장될 그래도 무슨 이름 붙은 작업에 종사하는 것도 아니고

부랑자로 걸식하다가 매혈, 꼬지꾼, 하꼬치기, 뒷밀이,...(다른 험한 말들은 그만)로 살면서

소년원, 재생원, 갱생원, 등의 기관 입소로 별을 여러 개 달았던 사람이

지게꾼 정도라도 해봤으면 ‘일일 근로자’라고 이력서에 적어 넣을까?

{아버지 직업을 묻는 담임교사에게 “곡물팽창업에 종사하십니다” 그랬다는 뻥튀기장수 아들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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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의 이야기는 지하철에서 만난 흉물(?)처럼 징그러워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보게 되는,

듣기 싫다면서도 호기심 때문에 귀를 기울이는 ‘두 도시 이야기’ 같은,

내가 가해자는 아니었어도 한풀이의 대상이 된 듯하여 죄송하다고 푹 고개 묻게 하는 이야기이다. 

{어느 이야기라도 중립적인 건 없고, 거기에 사회고발 혹은 제 형편 변명 같은 걸 담게 되지.}

그 뭔가 왕년에 황석영이 가필했다는 이동철의 ‘꼬방동네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우린 그런 얘기들 몇 개쯤 알고 있다. 

{저자/ 주인공이 인세와 명성으로 상류사회 진입이 가능해졌다는 후일담까지.}

 

전직 일일 노동자 김신용의 더 이상 흥미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맘이 적이 놓인다는 보고가 이렇게 길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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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특정기사와 관계없음

 


     「도장골 시편-민달팽이」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감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納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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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무슨 ‘고발’을 기대할 것도 아니고 그저 잘 있다는 소식 들으면 되는데,

무슨 철인이나 된 듯 한껏 폼잡는 게 사뭇 언짢기도 하다.

{아, 마지막에 “치워라 그늘!” 한 것은 촌티의 극치구나.  구여버.}

하긴 나이가 있는데 (나보다 한 살 위네...) “다 그런 거야”로 나와도 흉은 아닐 것이다.


그래, 그렇게 걷는 거다.

있으나마나 벗어도 괜찮을 납의 하나 걸치고.

가면 가는 거지 가고 있으면서 왜 가냐고 할 것 없고

때 되면 요란한 춤사위로 한번 몸 풀고

수류화개(水流花開)란 말 이제 알겠네.

추월선 따로 없는 길에서 일부러 가속할 일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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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맨살로 맨땅 딛는다마는

늘 오체투지로 기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패각(貝殼)이랄 것도 없는 무슨 허술한 수레 하나쯤 있으면 안 돼나?


아니 그냥 변변한 가림이라도 있는 게 좋겠다

다들 옷 입고 사는 세상에서는.


어른이 어제 그러셨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데 나는 나뭇잎으로도 가리지 못하는구나.”

{배변 때문에 글리세린을 넣고 누가 닦아드려야 하는 게 수치스러워서.}

“그건 그런 말씀이 아니고...” 할 것 없고

“헌 옷 벗고서야 새 옷 입게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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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민달팽이(slug)라는 것들이 텃밭이라도 가꾸는 사람들에게는 박멸해야 하는 악종이다.

약한 미물이라도 저 살자고 꼼수 쓰는 데는 나름대로 비책이랄 만한 것들이 있어서

대낮에는 숨어 있어 눈에 띄지도 않는데 밤새 새싹을 결단내곤 한다.

그럼 어떻게 없앨 것인가?

맥주를 깡통에 담아 밭에 묻어두면 그 냄새에 끌려 투신 익사케 하는 방법이 있지만 돈이 들고

계란껍질을 구어 곱게 빻아 설정한 방어선에 뿌려놓으면 연체동물에 박힌 뾰족한 파편이

치명상이 되어 죽고 마는데, 그건 공이 많이 든다.

해서 돌이나 낙엽더미를 들추며 보이는 대로 집어 누르는 수밖에 없는데,

살아남은 것들은 다 그만큼의 악행-채전의 주인이 보자면-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그 연체의 흐느적거림이 비애스럽지만

     이빨이 없어, 부드러운 새싹부터 갉아 먹는 식성들의 습격을 받으면

     배추밭은 전멸이므로

     어쩔 수 없이, 밤마다 손전등 불빛을 켜들면

     그 불빛이 닿을 때마다 잽싸게(?)흙빛의 보호색을 띤 패각 속으로 몸을 웅크리고

     물방울처럼, 흙바닥으로 도르르 굴러 떨어지는 것들

     밟으면, 뱉어놓은 침처럼 힘없이 으깨지는 것들

      (... ...)


     세상이

     자신 앞에 차려진 풍성한 식탁인 줄 알고

     어두워지면, 맛있게 갉아먹던 그 벌레의 길이

     자신의 길인 줄도 모르고-,


     오늘도 세상의 식탁 앞에 앉은, 물렁해

     슬픈 것들-,

     자신을 지킬 뼈 하나 없어, 등에 짊어진 패각까지 보호색을 띤

     은유의 달팽이들,

     그 야행성들-.


      (김신용, 「물렁해, 슬픈 것들」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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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가는 길이 매끈한 대리석이나 카펫은 아니어서

자주 긁히거나 찔린 시시한 찰과상들이 파상풍을 불러오듯

이렇다할 사인도 없이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가다가 만나는 존재들에 무슨 선인, 악인이 따로 있겠는가

깨달음이 불필요한 이, 늦게 온 이, 깨닫지 못하고 가는 이들이 있겠고

한풀이의 대상을 가리지 못한 채 좌충우돌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렵게 살아도 “다 그런 거지” 하며 끝까지 원망하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살자고 배춧잎을 갉아먹는 민달팽이와 약자를 등쳐먹는 악한이 같은 부류는 아니겠으나

잠파노야 안토니 퀸이 맡은 ‘배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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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생명의 순례 길에 “때는 늦으리”라는 노래나 안 부르면 좋겠다.  


{아 김신용 얘기였지

아무리 늦어도 아주 늦은 것은 아니라는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얘기,

좋은 시 더 뽑아 고치 짓는 누에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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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젤소미나의 트렘펫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