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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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낳은 데, 자란 데, 어른들 아직 계시거나 묻히신 데가 같지 않고 

어렸을 적에라도 자주 옮겨 다니어 딱 ‘거기’라 할 데가 없으면

어디가 고향이랄지 집어말하기가 그렇다.

꼭 공간적, 지리적 좌표만은 아니고

그 시절 그 동네 그 사람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랄까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랄 수 있는 마당(Gestalt)

돌이키거나 돌아가거나 다시 만날 수 없다 쳐도

있기는 있었던 게 분명하면

“거기 그거 왜 있잖아”가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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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너머 또 너머 아득한 고향이라 해도

산이 막혀 물이 막혀 못 갈 데는 아닌데

시인 김규동은 가지 못했다.

그 뿐이랴, 월남 유민(流民)만이랴

누구라도 그렇겠네

그대 고향에 가지 못하리.

{떠난 바보 정지용, 오장환

눌러앉은 바보 백석뿐만 아니고

다 그렇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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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못하기에 고향인 게지

그래서 그리운 거지

전원주택이니 펜션 짓고 드나들 데가 고향이겠는가.


마지막 사랑이고 싶었던 첫사랑

그 순진한 새끼손가락걸기도 고향이라 부를 수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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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옛날 다방을 고향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잃었으나 잊지 않아서 그리운 것들 중의 하나.


어떻게 마름모 명찰 붙인 교복 입은 채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무교동의 ‘교차로’로 시작해서

학교 앞 학림, 낙산

옆 동네 파리, 숙녀, 빅토리아, 미뇽

시청 앞 가화, 명동 설파

나중에 생긴 음악실들을 출입했다.

같이 다니거나 만날 사람도 용건도 없는 미친 시간보내기.


30원 하다가 50원으로 오른 ‘꽁피’ 값이 없을 때가 많아서

무보수 DJ를 자청하기도 했다.


대구에서는 난리 통에 문인들이 드나들던 녹향

그리고 변변찮아도 음악실이라고 했던 ‘하이맡’에도 발도장 찍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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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 그 ‘Heimat’라는 말 나오기 힘들었네.

영어로는 고향을 뭐라 할까, hometown? old home?

{그게 참 멋도 맛도 없는 말이네.}

조영남이 꺼떡대던, 아 Tom Jones가 시작했던가, Green green grass of home

그건 좀 느낌이 와 닿네. 


4 19로 휴교하는 동안 라디오 듣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는데

그때 마리안 앤더슨의 목소리로 “Carry me back to Old Virginy”를 들었다.

그해 여름 분원초등학교(지금 백자박물관 자리) 옆 백양나무와 전나무 숲에서 울어대는

매미들을 제압할 만큼 고성방가로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반복했다. 

{말하자면 거기가 내 ‘고향’이었는데.}

{몇 해 전 테네시에서 펜실베이니아로 가는 산길, 웨스트버지니아의 옥수수 밭 옆에서 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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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노래들을 먼저 배웠을까?

그리운 날 옛날은 지나가고, 옛날의 금잔디, 마루를 구르며 노는 어린 것 세상을 모르고노나.

{한국가곡 좋은 것 많던데.}


 

4


연말에 떨어져 지내는 가족, 오래 외국에 나가 있는 이들, 고향하늘을 바라보며 누울 자리 찾는 이들

{음 뭐 나도...}

그래서 우리 노래 몇 곡 올리려다 또 일없이 길어졌다.

{칠거지악이 아니고 경구로 받으면 되겠는데, 多言則去(갈 때 되면...)}


‘한국’을 생각할 건 없어요.

어디서든지 잘 사시면 되지요.   

간 건 간 거고

되찾을 수도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

올 것 갈 데나 잘 알아보자고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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