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아버님은 은퇴하실 무렵부터 “내가 이제 살면 얼마나 산다고...”라고 그러셨다.

그러니까 아무 준비도 하지 않으신 셈이다.

집 한 칸 마련하려고 해도 “들어가서 얼마나 살겠다고...” 그러며 전세로 돌기 20년,

그래서 재계약할 때마다 돈 마련하기가 힘들었다.

가구 하나 바꾸려 해도 “불편한 대로 살지, 들여다 놓고 좀 있으면 버리지도 못하고...”


그런 정물화에 32년이나 떨어져 있던 아들을 끌어들여 나도 고여 있는 시간 속에 그냥 떠있다.

전대의 세계관과 습관에 길들여진 척 숨죽이고 산다.


{나는 “산다면 얼마나 산다고” 그러지 않는다.

계획과 대책 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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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내가 뭘 보여줄 게 있는데...” 하시더니 글 한쪽을 내미셨다.

미국에서 고인이 보낸 카드를 받고 쓰신 답장이라고.


     어느 날 문득 들려온 님의 음성은

     “자는 자여 어찜이뇨”

     잠든 영혼 깨우치니

     님은

     나를 흥분시킨 하나님의 천사,

     나를 비친 하늘의 별,

     나의 갈증 적셔준 옹달샘,

     나의 잠긴 문 따준 신비의 열쇠

     님이여,

     심장이 뜁니다.

     귀가 열려 소리를 듣고

     눈이 떠져 ‘사람’이 보이고

     아 님의 소리는

     “나자로야 나오라”는 그분 말씀 대독한 천성이셨죠.


     짙은 향기 담긴 아름다운 글까지 보내주셔서 더욱 감사하오며

     위의 글을 새해 인사로 대신합니다.


     33538 날을 살고 2007년 1월 1일 아침에  


                                                                                                              {항상 명랑하고 총명하신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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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이혼’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비난할 것도 아니고...}

살날이 얼마 남았든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새 인생’ 살아보겠다는 것이리라.

수동적으로 끌려가지는 않겠다고

혼자 사는 쓸쓸함이 같이 견뎌야하는 지긋지긋함보다는 낫겠다고.

{“내 청춘 이제부터”이어서는 아니리라}


그래도 저물녘에 따로 가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

아니 길 떠나기로는 너무 늦은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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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Abide with me, fast falls the eventide”

{땅거미 내려앉는 시각에 가긴 어딜 가신다고, 저와 함께 유(留)하사이다.}

그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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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을 바라볼 때는

“참 다행이지 뭐 당신 만난 게

많이 미안하지 그렇게 산 게”

다들 그런 마음일 것 같다만...


{안개처럼 내려앉는 그리움

구름처럼 떠도는 마음이 아주 가시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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