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안식할 날
아 뻑적지근하다.
그래서 놀고 나면 쉬어야 하느니라.
하루 쉬면 또 놀고 싶어지니까
놀고 쉬고 쉬고 놀고
그러면 좋겠다.
장욱진, ‘수하(樹下)’
‘Homo ludens’라고 그러면 가만있다가
‘놀고먹는 사람’이라고 하면 꿈틀거리지도 않는 기생충 보듯 하는데
그렇잖니, 일하는 것도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고
먹고사는 거야 우리에 갇힌 짐승이라도 부족함이 없지만
놀기도 하자는 게 뭐 잘못됐냐?
놀다보면 배고파지고
먹었다고 누워 잠들 게 아니고
놀자는데?
혼자 놀 수는 없으니까
{짝이 없는 놀이를 자위(自慰)라고 그런다며?}
물리지 않는 놀이꾼과 오래 오래 장난치면 좋겠다.
{별장과 X은 좋을 때 좋은 거지 처치곤란이라니까.}
복잡하지 않은 새 게임 익혀가면서.
아무튼 나 오늘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왜 그러지, 매 맞은 것 같네?}
‘일’이 생겼다.
“이것 타자 좀 쳐다오.” 하며 첨삭 정정의 흔적이 많은 ‘시’ 원고를 내미신다.
창작 의욕에 불타시는 어른께서 무슨 잡지에 특별 기고를 부탁받으셨다고.
“어디 손볼 데 없겠니?” 하실 만한데 그러지 않으셨다.
{아마도 물으셨다면 “행을 토막 친다고 시가 되는 건 아니니까 전면적인 수정을...” 했을 것이고
그랬다가는 생시에 남북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냥 타자만 쳐드리면 되니까.
{존심과 존심의 수분(受粉)작용이 쓴 열매 하나 더 맺은 셈.
꼭 머리와 가슴 사이만큼 일촌(寸)이 일척(尺)이다.}
마침 미국에서 안부를 묻는 전화에 대고 떨리는 음성으로 낭독하신다.
{그녀는 문예를 숭상하지 않는 신앙인이다.
크게 칭찬했을 것이다.}
「맞춤옷」
나는 지난 수년 내
몇 번이나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가곤 하였다.
그 비명 같은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이렇게 나는 오락가락 ‘죽음의 연습’을 반복하였다.
삶의 한계점!
나는 그 즐겨 읽던 책도
일상의 옷가지도
필요한 이에게 내주었다.
‘쓸데가 없어서’이었다.
나에게는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맞춤옷’
한 벌이 있다.
혹 좀이라도 칠세라
해마다 한 두 차례
햇빛을 쏘여주면서.
반드시 쓸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옷 제작에 아픈 몸 일으켜
거들던 아내의 손놀림
그 옷자락에 혹 지문이라도...
이렇게 씩 웃으면
어느새 나타난 그도 미소 짓는다.
나는 “쓸데없다” 하였는데
하나님은 “너도 쓸데 있다” 하신다.
‘새 맞춤옷’을 보여주시면서.
“나도 쓸데가 있다.” 아멘.
{필경이 가필, 변조한 데 전혀 없음. 서명.}
나중에 다시 보니 괜찮다.
나도 오늘 한 건 했네.
나도 쓸데가 있다.
<주> 저녁에 부축 받지 않고 내 방으로 오셔서
“고칠 데 있거든 어떻게 좀 해봐, 읽는 사람 위주니까...” 하셨다.
두어 군데 바꿨는데 “그게 낫구나.” 하셨다.
실린 원문은 그대로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