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2 (시)


명절이 되면 얼른 떠오르는 시로 백석의 ‘여우난골족(族)’을 꼽을 수 있겠다.

그렇게 친족들이 모여 웃고 떠들며 음식 준비를 하는 정경(情景)이 내게는

회상이 아니라 동경으로만 다가온다.

가난하고 바쁘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가족에 일가친척도 없지 않았는데 모이지를 않았다.

별나게 사이 나쁜 것도 아닌데, 아버님은 그렇게 다니지 않으셨고 다른 이들이 어려워했다.

내가 자라서는 육 남매가 여러 나라 여러 도시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흰 두루마기 차림에 어린 것들 옥빛 남빛 옷들 입혀 병아리 떼 몰 듯 데리고 다니고 싶다.

설빔, 덕담, 만두 빚고 가래떡 썰기, 차례... 다른 집에서나 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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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으로 시작했는가, 「사슴」같은 데 실린 시들을 남긴 사람이 어찌하여 거기 남았을까?

아이 돌이라고 사람들이 모인 것을 두고 쓴 시가 이렇다.


     이깔나무 대들보 굵기도 한 집엔

     정주에, 큰방에, 아이 어른-이웃들이 그득히들 모였는데,

     주인은 감자국수 눌러 토장국에 말고

     콩나물 갓김치를 얹어 대접을 한다.  

     (... ...)

     그들의 목숨도 사랑도 그리고 생활도

     당과 조국에서 받은 것이어라.

     그리고 그들의 귀한 한 점 혈육도

     당과 조국에서 받은 것이어라.

     (... ...)

     나도 이 아침 축복 받는 어린 것을 바라보며,

     당과 조국의 은혜 속에 태어난 이 어린 생명이

     당과 조국의 은혜 속에 길고 탈 없는 한평생을 누리기와,

     그 한평생이 당과 조국을 기쁘게 하는 한평생이 되기를 비노라.


      -‘축복’ (부분)-


지금은 거기서 그런 것도 먹어보지 못하겠지만...

그런 ‘시’ 쓰자고 거기 남았는가.

[빛바랜 왕년의 솜씨 흔적 + 사회주의 찬양(본심이든 검열통과용이든)]이라는 조합으로

빼면 ‘공무 려인숙’ 같은 시가 나온다.

게으른, 하염없는 눈물 한 방울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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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정신작용은 무슨 ‘사실’을 접수하더라도 최단시간 내에 ‘교훈’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있음’은 그대로 남으면 안 되는가?

‘있어야 할 것’으로 지키든지 ‘되어져야 할 것’으로 바꿔야 하는지?


교훈이 싫다는 게 아니고

시와 교훈은 같이 가지 말자는 얘기.

{미국에서는 “Drinking and driving do not mix”를 음주운전 예방 구호로 사용한다.}

{양보해서} 꽃병이라 치고 너무 많이 꽂지는 말자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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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난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김종길, ‘설날 아침에’-



아, 알았어요.

그렇게 맞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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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오세영...  옛적에 파마한 머리 제 모습이었는데도 너무 촌스러워 기도 안차는...

모국어... 아휴~


     새해 첫날은

     빈 노트의 안 표지 같은 것,

     쓸 말은 많아도

     아까워 소중히 접어 둔

     여백이다.


     가장 순결한 한 음절의 모국어(母國語)를 기다리며

     홀로 견디는 그의 고독,

     백지는 순수한 까닭에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하다.


     새해 첫날 새벽

     창을 열고 밖을 보아라.


     눈에 덮혀 하이얀 산과 들,

     그리고 물상들의 눈부신

     고요는

     신(神)의 비어 있는 화폭 같지 않은가.


     아직 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눈길에

     문득 모국어로 우짖는

     까치 한 마리.


      -오세영,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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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나이 들면 시들해지고

“보라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로 나오게 되나봐.

김동리 님{또, 음~}의 유작 시랄까 생전에 발표되지 않았는데, ‘설날 아침’이라고...


     새해라고 뭐 다른 거 있나

     아침마다 돋는 해 동쪽에 뜨고

     한강은 어제처럼 서쪽으로 흐르고

     상 위에 떡국 그릇 전여 접시 얹혀 있어도

     된장찌개 김치보다 조금 떫스름할 뿐

     이것저것 다 그저 그렇고 그런 거지

     그저 그렇고 그렇다 해도 그런대로

     한 해 한 번씩 이 아침에 나는

     한복으로 옷이나 갈아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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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다 그저 그렇고 그런 거지.

그래도...

오늘 내 심사가 좀 사나와 투덜댄다만

아직 남의 시 베껴 쓰는 일 하고 있잖니?

 

 

아 교훈~ 나도 그 짓 잘 하거든.

국민학교에서 부르던 노래로 정인보 작사 이흥렬 작곡 ‘새해의 노래’라는 게 있었다고.

일절 끝 힘차게~


     뉘라서 겨울더러 춥다더냐

     오는 봄만 맞으려말고 내 손으로 만들자


{“응, 어떻게?” 하지 말고.}

이절도 힘차게~


     뉘라서 세월더러 흐른다더냐

     한이 없는 우리 할 일을 맘껏 펼쳐보리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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