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아 문 열어라
‘방콕 이집트’로 머물다가 이래선 안 되지 싶어 밤에 나와 좀 걸었다.
그새 다리에 힘이 떨어진 걸 보니 일년 동안 바깥구경하지 못하신 분을 부축하면서
생각으로라도 “왜 힘 좀 쓰시지 않고...” 했던 게 걸린다.
화신(花信)이 예년보다 열흘 이상 빠르다고 하니
한 주일쯤 후에나 외치면 내 호령에 순종하여 개화한 듯 때를 맞추겠으나
움틀 때 나는 비린내 섞인 바람 탓에 마음이 급해졌다.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에고, 젊었을 적 같지 않아서 목소리에 심후한 내공을 닮지 못하니 들은 척도 안 한다.
무안해져서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중얼거리다가
“어이하긴 뭘, 또 사는 거지, (피식)”으로 끝났다.
‘또’ 산다는 건 이어진다는 말일까, 새 삶을 받는다는 뜻일까?
조전춘신(早傳春信)과 유자소영(幽姿疎影)으로 사랑 받는 매화를
{잘 모르는 문자 쓰지 말 것을...}
그 늙고 껍질 터진 등걸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냥 상큼발랄의 귀염 받는 소녀였을 것이다.
“옛 피던 가지에 피엄직도 하다마는”이라 그랬지만
보다 정확히는 ‘옛 등걸의 새 가지’라 해야 할 것이다.
정체성(identity)은 지속 때문에 가능하지만
생명은 단절과 초월이니까.
봄꽃이 백 가지만 되겠는가
그 많은 꽃들 중에서 하필 매화가 받는 가산점수가 터무니없이 높아서
하나 잘 봐주겠다는 마음-사랑이란 그런 건지...-을 뭐라 할 건 아니지만
다른 꽃들에게 미안하다.
나무에 달리는 것이라면 벚꽃, 개나리, 진달래, 살구꽃, 배꽃, 사과꽃...
언 땅 뚫고 나오는 것으로는 크로커스, 튤립, 수선, 히아신스...
서양 꽃이라 좀 그렇다면
달래 냉이 꽃다지 모두 캐보자?
{모두는 말고.}
냉이꽃 채웠던 자리에 자운영 들어서고
나비는 그럼 꿀을 취할 것이고
나비 왔다간 자리에 열림이 있을 것이고
열림이 많은 여름에 나비는 더 바빠지고
그러면 거둠-가슬, 가을-이 따른다.
들앉음-겨울-이 지겨울 때쯤 덧문을 열고
그래도 갑갑하면
잠깐현기증 무릅쓰고 나오는 것이다.
봄은 이렇게 나와서 보는 것이다.
꽃 보듯 님 보며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날게 되리.
머물려 매달리는 게 아니고
은하수 다리 놓일 때까지 기다릴 게 아니고
훨훨 날아.
{삐치진 말게 매화가 어떻다는 게 아니고...
좋구나 매화로다 어야더야 어허야 에 디여라 사랑도 매화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