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춘심(一枝春心)
이조년의 시조가 아니라면 알지도 못했을 ‘일지춘심’이라는 말
그때 어머님이 편지에 쓰셨다.
국제전화는 말할 것도 없고 우편요금도 비싸서 무게를 줄이고자 미농지라는 걸 사용했는데
그것마저 앞뒤로 쓰는 바람에 볼펜 잉크가 번져 나와 좀 지나면 읽기가 어려웠다.
봄이 왔다는 말씀을 “개나리 꽂은 병에서 一枝春心이 흐른다.”라고 그러셨지.
“우화~ 울 엄니가 문자 쓰셨네.” 정도 마음이었던 것 같다.
30년 전 얘기.
기생 이름쯤 되는지 말 그대로 한 가지인지 알 바 아니고
“일지춘심을 자규(子規)야 알랴 마는”은
“어찌 네가 내 마음 알리”도 아니고
‘나만 슬프다’는 얘기도 아니고 ‘나도 슬프다’는 뜻으로 그랬을 것이다.
다 슬프니까.
그때만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더 슬플 때도 있고
그럴 때는 다들 슬퍼하니까. 괜히.
일지춘(一枝春)에 생(生), 성(盛), 멸(滅)이 다 들어있다.
개화를 기다리는 봉오리, 여럿 중의 하나지만 그래도 눈 마주치기를 기다리며 웃는 꽃,
시들었지만 좀더 얹혀있는 천덕꾸러기.
꽃잎 흩어지면 열매 맺힐 테니 그리 슬플 것도 없다.
상실에 대한 보상이 없어서가 아니고 그냥 슬픈 거니까
왜 슬프냐고 추궁할 것도 아니다.
봄보다 슬픔이 앞섰구나.
Ah, non credea mirati si presto estinto, o fiore
from 'La Sonnambula' (Anna Mof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