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부르고 싶었지만
정월 대보름에 매화 보기가 쉽지 않은데
윤달인가로 척척 밀려 대보름이 늦게 온 데다 추위는 빨리 물러나고 보니
남도에는 벌써 만개했더란 말이지.
달과 매화, 그런데다 춥지도 않으니 그림이 되나보다 했는데
그게 다 맞아떨어질 수는 없어서 아뿔싸 비가 내리는구나.
그것도 봄의 전령치고는 기세가 지나치지 않은가 싶도록.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같은 사연 없으니까
덤덤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다지... 그러니까 애절하거나 그렇지는 않아.
나 못나간다고 쌤통이랄 것도 없고 꽃놀이 달맞이 준비한 이들에게는 안 된 일이야.
{꽃...이야 서울서는 좀더 기다려도 되니까.}
“이 비 그치면”이라는 말 너무 흔해졌으니
{좋으니까 좋아하는 거지
많이들 좋아한다고 통속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 무슨 노래를 고른다?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 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 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고정희, ‘봄비’-
제가 무슨 혁명가라고...
난 그 촌스런 선동이 싫다마는
그래도 봄에는 무슨 뭉클함 같은 걸 뱉어내야 하니까
그냥 들어주기로.
산천초목을 호명하면 모두 “Present!”라고 대답하겠지?
캘리포니아에는 겨울비 그치면 거의 민둥산이나 다를 바 없는 산이
온통 꽃으로 뒤덮인다. 양귀비-약 안 되는-가 지천이었지.
텍사스에도 겨울 같지도 않은 철을 보내버리는 비가 오고나면
황무지에 blue bonnet이 깔린다.
이제 남선에는 강이 언다든가 하는 추위가 좀처럼 없으니까
쩌정 쩌어엉 하는 단단한 얼음에 가는 금 새기는 소리
쩌르르 하며 한 조각씩 녹아 떨어져나가는 소리 들을 수 없지만
“강이 풀리면”이라는 그 기대
{언 적 없다니까 그러네}
그건 가시지 않아서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임도 탔겠지
임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김동환, ‘강이 풀리면’ 중-
‘강 건너 봄이 오듯’ ‘산 너머 남촌에는’ 그런 노래 부르고 싶었지만
아니다, 보름이니까 ‘Vaga luna che inargenti’가 어울렸을 것이다.
내친 김에 ‘Vaghissima sembianza’를, 또 ‘O del mio amato ben’도 뽑을 수 있었겠는데
우천으로 노천음악회는 무기연기.
부르지 않았으나 봄은 벌써 왔고
대보름 같진 않아도 달은 또 차오를 테니까
비 오는 밤 그냥 빗소리 듣기로.
{“님이 오시나보다” 그런 느낌도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