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3편 - 김상옥
그 왜 박재삼하고 이형기 같은 짝꿍 말이지
먼저 간 사람을 어쩌지 못해
이름 한번 불러보자
아아 박재삼!
이왕 갔으니
내 자리도 네 가까이 하나 봐다오
고향 사람들, 어릴 적 만난 친구가 그런 건데
동향 시인들 사이에 무슨 존심 대결이나 피 말리는 수상전이 있겠어?
감정을 공유하면서도 표현이 다르고 그럴 수 있는 건데
돌이 뭐라고
돌 두고도 말들이 다르더라고.
초정(艸丁) 김상옥.
‘시조 시인’이라는 말 그거 참 억울한 거야.
그 정형 안에 가두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러니까 그게 대단한 기술인데,
시조라고 그러면 괜히 격이 떨어지는 것 같고
미분화된, 그러니까 ‘시인’보다 덜 진화된 이를 두고 앞에 두 자를 덧붙이고
잘 봐주면 ‘필요한 시대착오자’ 정도로 쳐주는데...
난 김상옥 차암 좋더라.
심심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완벽을 일부러 나타내지 않으면서 아주 괜찮은
그가 사랑하던 백자 같더라.
청마의 ‘바위’를 두고 하는 얘기겠지
불감부동(不感不動)의 시인이니 그러는데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그랬다마는
그 ‘돌’은 어떠냐고?
숨쉬지 않는
잠이 있나요?
-바로 저런 겁니다.
잠자지 않는
꿈이 있나요?
-바로 저런 겁니다.
꿈꾸지 않는
넋이 있나요?
-바로 저런 겁니다.
흠, 또 다른 통영 시인이 ‘무의미 시’론을 들고 나왔다고 항의하는 건 아니겠지만
아무튼
의미는 성가시고
무의미는 더욱 부질없기로
엎드려
숨도 쉬지 않고
입을 봉한 지는 이미 옛날,
적막도
정녕 저러하다면
목숨들 한번쯤 누리고지고.
그 ‘돌’ 또 나온다.
이끼 속
주름진 옷자락
한쪽 어깨를 추스릅니다.
바람에
연꽃이 벙글 듯
입 언저리 미소를 머금습니다.
이윽고
유서를 고쳐 쓰고
또 서늘한 가을이 옵니다.
돌은 돌이니까 돌 아닌 것과 비교할 것도 아니고
돌이라고 돌이기만 하지는 않아서
‘돌 같다’는 말로 누구에게나 뜻이 통하지도 않는다.
{돌이야 답답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