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에
이젠 좀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는데, 말이야 바르지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그리고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만일 김억 시인이 조선블로그에 ‘봄은 간다’를 실렸다면 댓글?
에공.
아직 봄은 다 온 것도 아닌데
서울에는 이제야 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맞이할 채비보다는 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어둡다.
그 어둡다는 게
오늘 하늘같아서
비는 그쳤지만 개이지 않아서인가 했는데
응, 왜들 마스크는?
나중에야 ‘황사’ 때문인 줄 알았다.
발 걷는 시각이 빨라지고 늦게 내리게 되었다면{“開簾時早下簾遲”, 白光勳}
무슨 기약이 있었던 겐데
그렇게 창가에 기대어 내다보기로 한다면
임이 밤에 당도한다면 맞이하지 못하겠네?
그때는 그런 노래도 있었는데... 후렴에서 “꾀♪ 꾀꼴 꼴♪ 꾀꼴” 하던
어제 불던 봄바람 꽃봉오리 흔들어
그게, 봄바람이라는 게
봄을 몰고 오고 꽃잎 벌어지게 했을 텐데
시름을 몰아내기는커녕 한의 실타래만 풀어놓고
{“東風不爲吹愁去 春日偏能惹恨長”, -賈至, ‘春思’-}
기운을 잃어서인가 아니면 죽어가는 마당에 동반하자는 건지
꽃들을 스러지게 하더라고.
{“東風無力百花殘”, 李商隱}
발 디딘 데가 어디냐에 따라서
먼저 피는 꽃 부러워하다가
늦게까지 남는 꽃도 있지만
결국 무너지는데
{무너진다고 요란한 소리 내지는 않고 그저 스르륵...}
그렇다고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까지 부르짖을 건 없다.
될 대로 되는 거니까.
아직 남았으니까...
목련꽃 그늘 아래서
뭘 한다?
{아직도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라고 해야 하는지,
목월 아드님께서 어떻게 손 좀 봐주실 수 있겠는지?}
자면 되겠다.
그때...
아이의 콧구멍과 입 언저리에 달라붙는 파리를 쫓아주고 싶었지만
코앞에 놓인 젖무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줄 오해받을까 싶어
대청을 떠났더랬다.
강가에 나가 나도 잠들었지만
바닥이 축축해서 이내 깼다.
궂은일은 다 물살로 흘러지이다.
강가에서 빌어본 사람이면 이 좋은 봄날
휘드린 수양버들을 그냥 보아 버릴까.
아직도 손끝에는 때가 남아 부끄러운
봄날이 아픈, 내 마음 복판을 벋어
떨리는 가장자리를 볕살 속에 내놓아…
이길 수가 없다, 이길 수가 없다,
오로지 졸음에는 이길 수가 없다.
종일을 수양이 되어 강은 좋이 빛나네.
-박재삼, ‘수양산조(垂楊散調)’-